[이코노믹리뷰=황진중 기자] 위기는 미래가 다가오는데도 변화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보건의료정보는 현재 개개의 병원이 생성·활용하고 있는 전자의료정보(EMR)부터 시작해 표준의료정보(EHR)까지 이용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나아가 병원이 아닌 개인이 의료정보를 직접 관리할 수 있는 개인건강정보(PHR)까지 진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보통신기술(ICT)에 기반을 둔 헬스케어 기기와 서비스가 등장할 것이라는 말은 많지만 현실은 이에 부합하지 않고 있다.

최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열린 의료 빅데이터 심포지엄에서 업계 관계자는 “EHR이 제대로 분석되고 있는 병원은 국내에 한 곳도 없다고 볼 수 있다”면서 “국내 의료정보는 표준이 없어 병원마다 데이터 구조와 코드체계가 달라 정보연계는 불가능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건보공단, 심평원, 국립암센터, 질병관리본부 등 4개 기관의 공공 의료 빅데이터와 개별 병원의 정보를 연결·융합하는 것은 규제 등 제도뿐만 아니라 이미 기술 수준에서 어긋나 있다는 얘기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의료기관의 EMR 운영 비율은 전체 77.8%, 병원급 91.4%, 의원급 77.0%으로 높은 수준이지만, 의료기관과 의료기관 사이 진료정보를 제공하는 기관은 45.3% 수준으로 반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정부, 병원, 기업 등이 각각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국내와 달리 미국은 블루버튼 2.0 개발자 회의에서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IBM, 세일즈포스, 오라클 등 여섯 개 기업이 협력해 보건의료 분야 상호 운용성 장벽을 없애겠다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개 표준(Open Standard)으로 ‘의료 데이터의 자유 교환’을 촉진해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나은 결과를 제공하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세운 것이다.

국내에서는 2016년 의료법 개정으로 국가차원에서 EMR인증이 권고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고, 자세한 내용도 알고 있다’고 응답한 의료기관은 9.5%에 불과하다. 이 제도는 올해 8월 13일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의료빅데이터를 개인별 맞춤 의료 서비스와 인공지능 신약개발에 활용하기에도 늦었는데, 이제야 첫 발을 떼는 셈이다. 게다가 이 제도는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참다 못해 “국가가 EHR 표준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정도다. 기존에는 비용 감소, 의료 서비스 효율화 등 산업면에서 의료빅데이터가 고려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활용방안에 대해 거듭 연구가 진행되면서 기초연구, AI 신약개발, 맞춤 의료, 만성질환 관리 등 국민건강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의료행위에 직접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적극 의료 빅데이터 활용에 대해 보건산업을 넘어서 국민건강증진이라는 인식 하에 규제 개선과 도입 지원에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