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빨간 맛 알아요?”

간단히 저녁을 마친 후 차를 마시면서 주제도 없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끝에 필자에게 툭 던져진 질문이었다. 순간 살짝 낯빛이 붉어짐을 느끼면서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빨간’이 붙어 있는 것들 중 생각나는 대부분이 민망함을 자아내는 것뿐이었다. 짙은 농담이 오가는 자리도 아니었고, 가벼운 정치에서부터 인문, 역사를 넘나들며 이어지던 대화 끝에 나온 ‘빨간’이라는 말에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질문을 던진 그 사람은 이어서 몇 개의 외래어를 나열했고, 그중엔 ‘레드벨벳’이라는 말도 섞여 있었다. 순간 아이돌 그룹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하필 왜 ‘빨간 맛’이라는 말을 해서 사람을 곤란하게 할까 하고 생각했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창피당할까 우려되어 한동안 잠자코 듣기만 했다. 듣다 보니 BTS에 이르러서야, 혹시 ‘빨간 맛’이 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노래 제목으로 본 듯도 했다. 유일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걸그룹 이름을 자신 있게 얘기했다. “소녀시대, 여자친구 같은 이름은 기억 나네요.”

 

‘빨간 맛’은커녕 에쵸티와 젝키, 핑클과 SES도 구별 못해

질문을 던진 사람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필자보다 연배가 더 높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요에 대해 일자무식인 후배가 안돼 보였던지, 걸그룹 이름들을 몇 개 더 알려주며 퇴근 후에 늘어지게 누워서 목적 없이 TV를 시청하는 것도 힐링이 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사람들과 대중가요, 특히 아이돌 그룹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항상 음악과 더불어 살고는 있다. 출퇴근이나 이동할 때나 등산 때에도 늘 음악을 듣고, 휴일은 눈 뜨자마자 켜놓고 책 읽을 때도 잔잔하게 음악을 틀어 놓는다. 요즘은 너무 편한 게, 블루투스로 다 연결이 되어 있어서 핸드폰 터치 몇 번에 음악 감상 환경이 구축된다. 다만 필자가 좋아하는 장르가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과도 겹치는 것을 겪지는 못했다.

대학 시절에서는 3S와 밴드에 심취해 있었다. 3S는 신해철, 신승훈, 신성우였고, 밴드는 부활, 들국화, 다섯손가락 정도였다. 얼마나 들었던지 나중에는 테이프가 늘어날 지경이었다. 특히 ‘비와 당신 이야기’에서 마지막에 절규하듯 반복되는 ‘사랑해’라는 구절은 33번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알고 보면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했다.

제대 후엔 ‘뉴에이지’에 꽂혀 반젤리스와 야니 같은 음악에 집중했고, 영화음악으로 영역을 넓혔다. 잔잔한 선율의 OST보다는 강렬한 액션 신을 뒷받침하는 웅장한 음악들이 신선했다. 이후론 친구나 후배 그리고 그 어떤 사람들과도, 대화에 등장하는 가요나 아이돌 그룹 이야기에서 필자는 오직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HOT나 핑클 같은 아티스트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1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무수히 많은 아이돌 그룹과 그들의 노래는 필자에겐 그저 익숙한 소음 정도일 뿐이었다.

흥겨운 멜로디가 나오면 왜 사람들이 몸을 들썩이며 춤추게 되는지, 필자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의문이다. 대학시절 선배들 손에 이끌려 몇 번 가본 춤추는 그곳은 지옥보다 더한 곳이었다. 플로어에 끌려 나가 남들 하는 흉내 몇 번 내본 것이 전부인데, 박자감이나 유연함도 없이 움직여야 하는 필자의 팔다리가 그때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인 적이 없었다. 이유도 없이 흐느적거려야 하는 움직임들이 불편함을 넘어서 혐오스럽게 다가올 뿐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세대 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서로의 관심사다. 등산, 자전거, 여행, 미술, 게임 등 분야도 많지만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영화나 가요다. 그중에서도 아이돌 그룹과 히트곡들이다. 하지만 쉽사리 극복되지 않는 것이 개인적인 선호도여서 분명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것임에도, 필자에게는 근접불가의 영역이었다. 후배들에게 커뮤니케이터는 늘 모든 것들을 관심사로 두고 섭렵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필자의 호불호를 넘지 못했다.

 

“홍보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요?”

워런 버핏이 일본 소니 회장이던 아키오 모리타의 뉴욕 집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었다. 버핏의 식성은 전혀 고상하거나 부유한 자의 것이 아니다. ‘~~을 하느니 차라리 아스파라거스를 먹겠다’고 할 정도로 몇몇 야채는 극도로 싫어했고, 품위 있는 요리보다는 팝콘, 아이스크림 그리고 햄버거를 좋아했다.

당시 모리타 부인은 일본의 유명한 셰프들을 동원해서 진귀한 요리들을 내놨지만, 버핏은 무려 15가지 코스에 이르는 동안 음식 접시에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물렸다. 당시를 버핏은 너무나 비참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음식을 거부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모리타 부인에게 이런 저런 대화로 너스레를 떨어가며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 뒤로도 일본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호불호가 갈리는 것처럼 음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지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마련이다. 요즘은 쿠키 영상을 심어놔서 인내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쿠키의 내용에서 다음 시리즈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감독, 배우 그리고 스탭 이름이 올라가는 동안 나오는 음악을 위한, 필자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은 드물지 싶다.

영화 음악 거장들이 많기도 하다. 엔니오 모리꼬네, 알프레드 뉴먼, 버나드 허만, 존 윌리암스, 제리 골드 스미스 등이 떠오르는데, 이들은 <석양의 무법자>, <분노의 포도>, <싸이코>, <현기증>, <슈퍼맨>, <스타워즈>, <빠삐용>, <혹성탈출> 같이 제목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한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한스 짐머의 음악에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 스스로가 지독한 짐머레스크(Zimmeresque, 한스 짐머의 마니아 족)가 되기를 자처했고, 그의 곡들을 소장했다. 그리고 스티브 자브론스키나 존 파웰 그리고 요즘은 브라이언 타일러 같은 그의 사단에도 애착을 가진다.

이들의 영화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마블의 시리즈 영화들 중에는 보지 않은 것들도 제법 있지만 그 배경 음악들은 애장한다. 애들이나 보는 것 아니냐 하기도 하고, 군가도 아니고 너무 센 음악이라거나 아름다운 선율이 없다고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그 어떤 음악들보다 감동이 크다. 가끔 해외 오케스트라 공연 실황 장면이나 스튜디오 녹음 영상들을 접하면서, 현악기와 브라스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르거나 강렬한 타악기가 뒷받침될수록 사운드가 웅장해짐을 느낀다.

그러다 어느 순간 ‘Two Step From Hell’로 이어졌고, 지금은 TSFH의 신봉자가 되었다. 차라리 이들 음악 장르를 ‘TSFH’르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마니아 층이 뚜렷한 음악이다. 소위 웅장한 배경 음악이나 에픽(Epic)으로 분류하는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강렬한 비트와 사운드를 보유하고 있다. 사실, 아무리 빼어난 영상이라 하더라도 음악이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감동의 문턱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TV영상은 30개의 화면이 모여서 1초를 이루고 영화는 24개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음이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결과를 우리가 접한다.

다른 부서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가끔 듣는 소리가 있다. ‘아니, 홍보 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에 두루두루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못 읽어도 일주일에 책 한 권 정도는 읽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건사고 등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기사들이며 심지어는 경쟁사를 포함한 업계의 동향과 소식에 대해서도 눈여겨본다.

영화 상고사 근대사 현대사 세계사 과학 스포츠 음식 전쟁 기후 등 거의 모든 관심사들에 대해 얇지만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극복되지 않는 부분이 앞서 익숙한 소음이라 했던 그 부분이다. 그 부분쯤에 대화가 이르면 꼭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의 말을 듣곤 한다. 변명 같지만 필자도 한 마디 하고 싶다. ‘워런 버핏이 아스파라거스를 먹으면 나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보겠다’고 하면 오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