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이태원 ‘우사단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곳은 현재 서울 시내에서 시세가 비교적 저렴한 곳이다. 필자는 얼마 전 주택을 매입해서 리모델링 후 임대사업을 하려는 고객의 의뢰로 우사단길을 방문했는데, 마침 지인이 이곳에서 거주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우사단(雩祀壇)길의 명칭은 용산구 보광동에 있던 마을로, 주소는 보광동 산4번지에서 기우제(祈雨祭)·기설제(祈雪祭)를 지내던 우사단의 근처 마을에서 유래했다.

한자의 뜻을 살펴보면 기우제 우, 제사 사, 제터 단이라는 의미다. 즉 가뭄이 들어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사단길 깊숙이 들어가 보면 현재도 점집들이 영업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터는 영적(靈)으로 발달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예술가들도 영감을 요하는 직업이기에 그들 역시 많이 이곳에 많이 모인다.

우사단길 인근 이태원은 조금 더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잔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숨진 고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모교인 이화학당 월터 교장의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일제는 이 일대 공동묘지를 군용지로 사용하기 위해 망우리 공동묘지로 강제 이장을 시켰고, 이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묘를 무연고 묘로 처리해 열사의 묘소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해당 사건이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것을 보면 의도성과 고의성이 있다는 의심이 든다.

이 사실은 현재 한글학회 이사인 84살 유재한 옹이 유관순 열사의 최후를 밝히기 위해 조사한 기록을 내놓으면서 밝혀졌다.

이런 과거는 잊은 채 이태원은 나날이 발달해 현재는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의 축제와 파티 등 국제적 문화마을로 명성이 높다. 우사단길은 그중에서도 1970~80년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한 골목이 많아 특별한 감성을 지닌 곳이다.

그리고 우사단길을 걷다 골목으로 들어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 주변에 이슬람사원과 할랄 음식점이 많고,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실과 쇼핑이 가능한 아기자기하고 클래식한 가게도 많다.

교통이 불편하며 고지대이고, 골목이 많고 좁아 주차문제와 차량 주행의 불편함 등의 조건으로 시세가 저렴하고 투자 가치 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다. 하지만 점차 우사단길이라는 브랜드가 형성되고 있고, 클래식한 감성 때문에 이곳을 찾는 이가 많은 것을 보면 장기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사단길 깊숙한 곳에는 사회적 소외계층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필자 지인의 말로는 한 많은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칼럼에서는 도시풍수적인 이야기보다 지역의 역사나 사건 그리고 현재 거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이태원은 아직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지역이다. 조만간 이태원의 도시풍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다루어 보겠다.

현재 서울 이태원 역사공원에는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성장현 용산구 구청장이 2014년 무렵 추진해 2015년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젊음의 거리이고 또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며 예술인의 거리로 발전할 수 있는 이태원과 우사단길에 이런 사실이 있었던 것을 한번 상기시키고 싶어서 이번 칼럼을 작성했다.

필자는 터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론 그 터를 우리가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것이 도시풍수이며 더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국토이자 역사다. 필자가 밟고 있는 조국의 땅과 역사를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이태원’과 우사단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