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수진 기자] 전자 장치 하나 없이 움직이는 로봇이 있다. 태엽과 톱니바퀴를 이용해 기계식으로 구동하는 자동인형, 오토마톤(Automaton)이 바로 그것이다. 수백 년 전 유럽 땅에 오토마톤의 대가가 살았다. 18세기 스위스, 스페인, 영국에서 활동하던 천재 시계 제작자 피에르 자케 드로(Pierre Jaquet Droz)는 아름다운 시계뿐 아니라 정교한 오토마톤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1775년 그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바친 작가, 화가, 음악가 모양 오토마톤은 스위스 뇌샤텔 박물관에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피에르 자케 드로의 유산을 받은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 자케 드로가 억 소리 나는 오토마톤을 선보였다. 올해 창립 250주년을 맞아 공개한 사이닝 머신이 바로 그 주인공. 이름 그대로 사용자의 서명을 대필해주는 장치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제작하는 유니크 피스로 가격은 375,000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4억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다.

 

▲ 사용자의 서명을 대신해주는 기계, 사이닝 머신. 출처=자케 드로

구동방식은 이렇다. 태엽 대신 레버를 당겨 동력을 충전한 뒤 보안을 위해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하면 펜을 끼워 넣을 수 있는 막대가 나온다. 막대에 펜을 꽂으면 기계가 스스로 움직이며 사용자의 서명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사이닝 머신의 크기는 가로세로 15.8 X 8.2cm다. 손바닥만한 사이즈 덕에 함께 제공되는 가죽 파우치에 넣어 가뿐히 휴대할 수 있다.

 

▲ 사이닝 머신의 앞면. 투명한 창을 통해 무브먼트가 움직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자케 드로
▲ 사이닝 머신의 뒷면. 출처=자케 드로

사이닝 머신을 구동하는 무브먼트는 총 495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투명한 창을 통해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동력을 최대로 충전하면 총 두 번의 서명이 가능하고 남은 동력은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이닝 머신의 소재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며 방수는 불가하다.

 

▲ 사이닝 머신과 함께 제공되는 가죽 파우치와 우드 박스. 출처=자케 드로

4억원짜리 사이닝 머신은 시계와 달리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고 투르비옹이나 미닛 리피터 같은 하이 컴플리케이션도 없지만 웬만한 명품 시계보다 주의를 끄는 물건임은 틀림없다. 수천억원대 계약서에 서명해야 할 때 다이아몬드가 박힌 만년필 대신 사이닝 머신을 꺼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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