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는 ‘Mr. X’가 드렉셀의 데니스 레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전에 드렉셀과 미팅할 때 보았던 레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레빈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기억할 수 있었다. 더욱 마음이 심란했던 것은 이렇게 큰 건에 자신을 로이은행 대리인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레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피트에게 다른 탈출구가 없었다. 로이은행을 구하기 위해 레빈을 SEC에 파는 방법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로이은행도 그것을 원했다. 피트는 나소의 호텔 방에서 SEC로 전화를 걸었다. 피트는 1984년 12월 17일 오전 10시 워싱턴 SEC 본부에서 이 사건의 책임자인 개리 린치와 미팅을 잡았다. 레빈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간이었다.

피트가 볼 때 SEC와의 협상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SEC가 레빈을 잡는다면 그것은 SEC로서도 대단한 성과임이 분명했다. SEC는 지금까지의 조사를 거쳐 확인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대어(大漁)가 눈앞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고 로이은행이 끝까지 법적 다툼을 계속한다면 SEC의 승리도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로이은행이 바하마 은행법을 근거로 고객의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버틴다면 SEC로서도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혈투를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사실 로이은행은 SEC의 주요 관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인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민형사상 면책을 주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만약, 로이은행이 문제가 된 고객의 정보를 넘겨준다면 SEC로서는 완승이었다. 바하마 은행법 위반 문제는 로이은행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이것이 피트의 협상 포인트였다. 피트는 SEC와의 딜을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SEC가 가진 패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12월 17일 오전 10시, 피트와 라우치는 SEC 집행국 책임자인 린치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린치는 이 일에 관여한 SEC 변호사들을 모두 미팅에 참여토록 했다. 린치의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은 그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후 피트는 무서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SEC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고객인 로이은행이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한 사실과, 28종목의 거래는 한 사람의 것이라고 말했다. 린치와 SEC 변호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월가의 유명한 거물이고, 은행의 간부들과 캠벨이나 메릴린치의 증권브로커들은 모두 그의 거래를 따라 한 것이라고 말했다.

피트는 여기서 승부수를 꺼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넘겨줄 테니 은행과 은행 간부들의 면책을 요구했다. SEC에 그 사람의 이름을 넘겨주기 위해 필요한 바하마 당국의 동의는 로이은행이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트는 추가로 법무부의 동의도 필요하다고 했다. 은행 간부들에 대한 형사 불기소도 분명하게 약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린치는 피트와 라우치에게 잠시 방에서 나가 있어 줄 것을 요청했다. 린치는 피트의 제안에 대해 SEC 변호사들과 논의했다. 모두 피트의 제안에 동의했다. 다만, 은행 직원들에 대한 완전 면책을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고객의 요청이긴 했지만 증거도 인멸했다. 30분이 채 못 되어 린치는 피트를 다시 불렀다. 피트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은행 서류를 파기한 마이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피트는 서류들을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그러한 딜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피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 은행 간부의 완전 면책을 요구했다. 린치와 SEC 변호사들은 움찔했다. 린치는 곧 피트의 제안에 동의했다. 린치와 변호사들은 미스터 X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러나 피트는 쉽게 그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피트는 서류들을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곧 고래를 잡게 될 것입니다.” SEC가 잡게 되는 그는 그냥 고래가 아니라 ‘모비-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데 그리 얼마 걸리지 않았다.

SEC와의 미팅이 있은 지 몇 주 후, 피트는 로이은행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뉴욕 남부지검을 방문했다. 연방 검사들은 이미 SEC로부터 얘기를 들었고, 피트의 방문에 커다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피트의 제안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다. 미스터 X는 월가의 거물로 보였다. 검찰로서도 새로운 승전고를 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줄리아니 검사장은 피트의 제안에 선뜻 동의했다.

이제 피트 앞에는 딜을 성사시키기 위한 마지막 허들이 남게 됐다. 로이은행의 바하마 은행법 위반 문제였다. 레빈은 자신의 신원을 공개하면 로이은행을 고소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로이은행은 바하마 은행법 위반으로 고소당할 위험이 있었다.

바하마 당국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 연방 검사들과 SEC 변호사들, 그리고 미국 바하마 대사와 로이은행의 수석 변호사가 바하마 검찰총장인 폴 애덜리(Paul Adderly)를 방문했다. 물론 피트와 라우치도 동행했다. 미국의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나소에 나타나자 애덜리는 놀랐다. SEC의 린치는 애덜리에게 증권의 거래 기록은 바하마 은행법에서 말하는 ‘은행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주식이 현금의 입출금과 다르다는 주장이 다소 모호하긴 했지만, 그 논리는 로이은행에게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하마의 검찰총장은 증권거래는 은행업이 아니라 증권업이라고 하면서 잠정적으로 린치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틀 후, 그는 로이은행이 미스터 X의 신원을 공개하더라도 은행법 위반으로 기소하지 않겠다고 문서를 로이은행에 보내왔다. 애덜레이의 입장은 레빈의 계좌 정보를 SEC에 제공하는 것은 은행법의 규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법리적 논거로는 매우 취약했지만, SEC에게 레빈의 정보를 주지 않을 수 없었던 로이은행의 입장을 옹호해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1986년 5월 9일 금요일, 피트는 린치에게 전화를 걸어 거침없이 말했다. “모비-딕은 드렉셀의 데니스 레빈입니다.”

로이은행과 SEC와의 딜이 이렇게 깊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레빈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1985년 4월 말, 레빈은 일상적으로 계좌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마이어에게 전화했다가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SEC가 레빈의 주식거래를 추적했으며, 정확히 로이은행을 통해 거래한 28개 종목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레빈은 메이데이인 5월 1일에 급히 바하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이미 일은 터져 버린 상황이었다. SEC가 어떻게 자신의 거래를 추적했느냐는 질문에 마이어와 플레처는 캠벨의 거래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레빈의 거래를 따라 했다고 고백했다. 스위스 본사까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레빈은 충격을 받았다.

레빈은 마이어에게 몇 개의 계좌가 자신의 거래를 따라 했느냐고 물었다. 마이어는 25개에서 30개 정도라고 말했다. 레빈은 기가 막혔다. 레빈은 마이어에게 그 주문들을 어떻게 처리했냐고 다시 물었다. 마이어는 그 많은 주문의 대부분을 뉴욕의 캠벨을 통해서 처리했다고 했다. 레빈은 “오 마이 갓(Oh, My God)!”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경악할 일이었다.

그러나 레빈은 침착했다. 그에게 아직 마지막 믿는 구석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바하마의 비밀보호법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로이은행은 SEC에 자신의 거래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다. 레빈은 이 점을 로이은행 측에 다짐하고 또 확인시켰다. 마이어와 플레처는 “알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이은행은 이미 오래 전에 루비콘 강을 건넜고, 레빈만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