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끄럽지만 필자의 얘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필자는 서른 초반의 초보 사업가다. 아직은 사업가라는 표현이 낯설고 어색하지만, 사업이란 걸 시작한 게 4년 전이었으니 그래도 이름 정도는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첫 사업은 대학 동아리 선배와 함께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게 사업인 줄 모르고 재미있길래 하다 보니 생각에도 없던 사업을 하고 있더라. 아이템은 그 시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던 애플리케이션 개발. 분야는 교육업이었다. 만들고 보니 운 좋게 호응을 얻어서 날마다 사용자가 늘어났다. 10만, 50만, 100만…. 빠르게 늘어나는 사용자 덕분에 정부지원도 받고, 법인 설립까지 하게 됐다. ‘투자도 받아 보아야 하니 받기 조금 더 유리하다는 1인 대표 체제를 갖추자’는 선배의 제안에 따라 가위바위보로 대표를 정하기로 했다. 필자는 가위, 선배는 주먹을 냈을 거다 아마. 그날부터 선배는 대표, 필자는 부대표가 됐다. 필자는 지금도 내가 보를 냈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아쉬움 말고 아찔함 때문에 말이다.

첫 투자는 스타트업계에선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만한 곳에서 받았다. 첫 미팅 하루 전날, 공용 사무실 한 켠에 마련된 수면실에서 선배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대한민국 교육은 어때야 하고, 앞으로 우리는 그 밑거름이 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있을 투자 심사는 안중에도 없이 말이다. 둘 다 뜬구름 잡는 인문학을 전공해서인지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다음날 사업 계획과 수익화 방안을 묻는 질문에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가 중요하다. 우리가 바꾸겠다”며 밤새 했던 이야기를 자신 있게 반복했다. 두 사람 모두 그날만큼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었을 거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날 우리의 눈빛은 이데아론을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플라톤의 눈빛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플라톤이나 그날의 우리나 둘 다 세상에 없는, 그러나 반드시 닿고 싶은 완벽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칼럼의 제목이 제목이니 만큼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 보자면 이데아론이란 사물과 사고가 지닌 완전불변한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 만물에는 각각의 이데아가 존재한다. 책상에는 책상의 이데아가,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이데아가 있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이데아를 베낀 일종의 복사물에 불과하다. 가령, 우리가 그리는 정삼각형은 우리 머릿속 ‘완벽한’ 정삼각형의 복제물일 뿐이다. 아무리 공책 위에 정삼각형을 그려도, 심지어는 컴퓨터로 정삼각형을 그려도 엄밀히 말하면 완벽한 형태의 정삼각형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어찌 됐든, 얼마 뒤 ‘가능성을 봤다’며 투자 결정 연락을 받았다. 신나서 오랜만에 밤새워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이후는 현실과 타협, 또 타협을 하는 과정이었다. 이 정도면 정삼각형에 가깝지, 이등변 삼각형도 최소한 두 변 정도는 길이가 같으니 괜찮아 하며.

얼마 전,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만났다. “죽기 전에 내가 이런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서른다섯 살에 쓴 소설을 읽노라면 다시는 그런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소설 역시 미래의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소설이겠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소설을 쓰는 순간은 모두 최후의 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다시 그런 소설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써볼 건 다 써 봐야만 한다.”

필자의 손으로 만든 회사를 나와 두 번째 사업을 준비하는 동안 또 새로운 정삼각형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마 이번 사업에서도 필자는 완벽한 정삼각형은 그릴 수 없을 게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이나마 더 완전한 삼각형을 그리기 위해 온 힘 다해 부딪혀볼 요량이다. 이 순간은 또 다시 오지 않을 테니, 꾸역꾸역 비뚤어지려는 펜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