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혜빈 기자] 1980년 말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에서 PC통신이라는 초기 인터넷 서비스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은 흔히 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 등으로 대표되는, 컴퓨터와 전화선을 연결해 이용하는 인터넷 서비스다. 많은 젊은이들은 PC통신의 동호회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취향을 공유하며 이 문화를 즐겼다. PC통신은 당시 문화예술 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하나가 새로운 장르의 문학 즉 판타지 문학이 등장한 것이다.

이영도 작가는 한국 판타지 문학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며 <드래곤 라자>라는 기념비라 할 만한 첫 작품을 통해 수많은 판타지 문학 마니아를 양성했다. 1997년 하이텔의 소설 게시판에 연재된 <드래곤 라자>는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1998년 종이책으로 출간됐고, 이 역시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리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지난 2008년 <드래곤 라자>의 10주년 기념판이 발행되었고, 이 역시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으면서 여전히 그 지지층이 굳건함을 증명했다.

▲ 소설 <오버 더 초이스>. 출처=민음사

이 작가는 <드래곤 라자> 이후 그 후속편의 성격을 띤 <퓨처 워커>,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그림자 자국> 등 활발하게 판타지 소설을 집필했고, 각각 수십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이 작가는 2008년 <그림자 자국>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만인 2018년 6월, 그는 <오버 더 초이스>라는 장편소설을 들고 팬들을 찾아왔다. 이 작가는 자기의 팬들을 ‘네크로맨서(Necromancer)’라고 부르는데, 이는 문학 속에서 강령술을 통해 죽은 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주술사를 뜻하는 단어다. 그의 작품이 PC통신에서 연재된 시절 새벽까지 연재를 기다리느라 잠을 자지 못한 팬들이 스스로 ‘좀비’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랫동안 ‘네크로맨서’에게 강령술을 부리지 않은 이 작가에게, 그 소감과 함께 이번 작품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서면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평소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는 그답게, 인터뷰 역시 오랜 고민 끝에 정리된 짧은 답변으로 이루어졌다.

“바보 같은 내 청춘에 보내는 건배는 사양한다”

이영도 작가는 10년 만에 작품으로써 독자를 만난다는 것에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다. 과거의 다른 인터뷰에서도 말을 무척이나 아꼈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10년간 기다린  독자에게 수줍게 “이번 작품을 내놓은 소감이 과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쑥스럽고 민망하다”고 말을 아꼈다. 100만부를 훌쩍 뛰어넘은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답지 않은 겸손함이었다.

▲ 이영도 작가. 출처=민음사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현재까지 40만부, 대만에서는 30만부, 중국에서는 10만부가 판매되는 등 아시아 지역에서 폭 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한국형 판타지’라고도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 고유의 정서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아시아 각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매력적인 콘텐츠가 지니고 있는 유효함의 한계는 없다’는 진리를 절감하게 했다. 이 작가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 “한국인 중에서도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조차 가끔 신비롭게 느끼는 편이다.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자기의 작품이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 그는 “내가 읽고 쓰는 말과 글, 내가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 자연스러운 호감은 당연히 가지고 있다”면서 따뜻한 시선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는 “내가 특별히 한국다운 면에 천착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면서 자기의 작품을 정의했다.

판타지 소설가라는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작가는 1918년 태어나 1985년 생을 마감한 SF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Theodore Sturgeon)의 말을 응용했다. 스터전은 “모든 문학의 90%는 쓰레기다”라는 강렬한 말을 남겼는데, 이 작가는 문학을 ‘장르’라는 기준으로 분류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장르 문학이 장르 문학이라서 자동으로 가벼운 것이 된다면, (그 반대 개념으로서) 비장르 문학은 비장르 문학이기에 (글의 문학 면에서의 완성도나 사유의 깊이와 상관 없이) 자동으로 고상한 것이 될 것이다”며 장르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음을 강조했다. 

“너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 될 수 없어”

이 작가는 첫 작품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고유의 재기발랄하고도 유머러스한 서술로 독자들을 사로잡아왔다. 특히 작중 인물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마치 그곳에 없는 인물이 객관성을 지닌 시선으로 묘사하는 듯한 이른바 제3의 시점으로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여기에 대해 “과분한 오해다. 다양한 문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서 고유의 문체가 지닌 매력을 축소하려 애썼다.

▲ 이영도 작가. 출처=민음사

이 작가는 특히 ‘인간성’을 탐구하는 것을 즐긴다. <드래곤 라자>에서는 인간을 비롯해 엘프, 오크, 드워프, 드래곤 등 판타지 속의 다양한 ‘종족’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인간 외에도 지성을 지닌 족종들이 함께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를 그리면서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번 작품 <오버 더 초이스>에서 그는 ‘종족’의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휴머니즘의 시선에서 사유하는 그에게 생명에 대한 정의를 묻자 “생명은 참 신기한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내 “진화론의 관점에서 모든 생물의 시작 형태는 굳이 구분하자면 식물이다. 외부의 비생물적 에너지를 이용해 대사 활동을 하는 생물이 선행되어야, 그 생물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생물인 동물이 나타난다”고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이 작가의 이번 작품 <오버 더 초이스>에서는 이러한 그의 견해가 더욱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에 대해 여러 각도로 질문했지만 “내 글에 대해 ‘특별히 무엇이다’라고 말할 권한은 언제나 독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며 둥글게 마무리했다. 새삼스럽게 독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할 말이 무엇인지 묻자, 그다운 말투로 “혹독한 더위 속에서 건강에 유념하기를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