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장영성 기자] 은행들이 실적을 발표했다. 역시나 사상 최대다. 상반기 4대 시중은행이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차) 등으로 벌어들인 순이자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1.3% 증가했다. 10조원을 훌쩍 넘었다. 지난해는 연간 순이자이익이 20조원 턱밑에서 멈췄지만 이런 속도라면 올해는 20조원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은행의 실적을 보면 눈에 띄게 늘어난 게 하나 있다. 바로 대손충당금 전입액 규모다. 대손충당금은 은행이 가계나 기업에 빌려준 돈을 못 받을 때를 대비해 미리 쌓아두는 돈이다. KB국민은행의 상반기 충당금 전입액(가계 기준)은 84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09억원) 대비 106.60% 늘었다. 우리은행 전입액은 860억원으로 전년 대비(650억원) 32.31% 증가했다. 신한은행의 충당금 전입액도 12.58% 불었다. 하나은행은 충당금이 줄었다.

은행들은 대손충당금을 쌓는 이유를 “가계대출 리스크를 대비한 선제대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충당금을 쌓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은행은 한국에서는 모든 업종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익을 내면 욕을 먹는 집단’이다. 국내 경기는 냉기만 돈다. 그런데 상반기 이익을 보면 은행만 잔치를 벌이는 셈이 된다. 그냥 두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충당금을 쌓아서라도 숨기고 싶은 게 한국의 현실이다. 충당금이 늘어나면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가계의 피를 빨아 이익을 낸다는 욕을 그나마 덜 먹을 수 있다. 통상 금융권 경영진은 충당금을 쌓으려 하지 않지만, 가계대출이 치솟는 시기에는 충당금에는 관대해진다. 은행들은 이런 의도로 충당금을 쌓는 것을 ‘리스크 관리’라고 말한다. 숫자를 이용해 비밀을 숨기는 것이다.

증권사는 다른 방식의 숫자놀음을 한다. 지난해 파생결합증권(DLS) 발행금액은 30조원을 넘어섰다. 이 또한 사상 최대치다. DLS는 풋 상품이다. 장차 대세 하락 시 주가 폭락의 주범이 될 상품이라는 것이다. 기초자산이 주가지수인 파생상품 주가연계증권(ELS)을 발행할 때 증권사들은 헷지를 위해서 의무로 판매액의 약 10%를 매번 공매도해야 한다. 지난해 발행된 ELS의 만기일은 약 3년 뒤인 2020년에 몰려 있다.

이때까지 종합주가지수나 주가가 하락하지 않으면, 증권사들은 시중금리의 약 3~4배에 이르는 금리를 ELS 상품 구매자인 개미투자자들에게 3년간 줄곧 이자로 줘야 한다. 이자는 평균 8% 정도다. 증권사는 바보가 아닌 이상 온갖 수단을 동원해 주가나 종합주가지수가 하락하도록 해야 한다. 증권사는 공매도 의무화로 자연스러운 주가 하락을 유도하기 위해 역마진 상품인 ELS를 개미투자자들에게 팔았다.

ELS는 만기일까지 목표지수나 목표가격까지 내려간다면 판매액의 40% 정도는 모두 증권사의 수익으로 돌아간다. 성공만 한다면 수조원이 증권사 계좌에 일시불로 꽂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식 시장의 대세 하락기는 2020년 5월 이후나 2021년 초에 시작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느 순간 시장 투자자들이 대세 하락기라고 생각을 바꿀 때 상황은 점입가경에 이를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금융회사는 어디인가. 우체국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체국은 정부가 100% 보유하고 있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우체국이 망할 이유가 없다. 우체국은 회사 이득을 위한 상품을 판다 해도 그 정도가 가장 약하다. 특히 보험 상품은 우체국 보험이 가장 유리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보험 상품 대부분은 보험사의 수익을 맞추기 위한 것이지 소비자를 위해 만든 것은 아니다. 보험도 은행과 증권사에 비해 만만치 않은 숫자놀음을 한다.

금융회사뿐만이 아니다. 현대모비스 가치평가 논란도 숫자놀음의 결과다. 현대모비스 분할부문의 수익가치 산정 과정에서 가중평균자본비용(WACC)은 12.58%로 지나치게 높았다. WACC은 기업의 자본 조달 방식 중 타인의 자본과 자기의 자본에 대한 비용을 가중평균해 산출한 개념이다. WACC가 높으면 가치평가 결과 값이 낮아진다. WACC가 12.58% 정도라는 것은 ‘앞으로 제품 출시 여부조차 모르는 수제 수퍼카 제조 회사가 외부에서 투자금 유치를 받으려고 가치평가를 받았을 때 예상한 결과 값’보다 ‘조금’ 낮다. 현대차가 새로운 안을 준비하겠다고 선을 그으며 일단락된 것이긴 하지만 입맛은 영 개운치 않다.

SK브로드밴드와 CJ헬로비전, 현대엔지니어링과 현대엠코 합병비율 산출 논란도 마찬가지다. 이 기업들의 합병비율 산출 과정에서 가장 많은 문제 제기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은 현금흐름할인모형의 가정이다. 현금흐름할인모형은 재무나 회계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가치평가 모형이다. 이론상 가장 완벽한 평가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론상 완벽성은 수많은 가정이 반영된 것이다. 과거 재무정보를 이용하고 있으나 미래현금흐름을 추정할 때 회사의 사업계획이 반영된다. 회사의 사업계획은 객관화된 것이 아닌 회사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경영목표를 근거로 한다. 따라서 산업 전망과 재무 목표가 합병비율 산출에 반영되지만 실제 성과는 그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즉, 현금흐름할인모형은 회사의 사업계획을 미래 현금흐름에 반영한다는 것 그 자체로 합병 비율 평가에 주관성이 깊게 관여됐다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다.

시장은 냉정하다. 회사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숫자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 소비자는 이런 숫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소비자들은 금융회사가 자기 이익을 위한 존재이지 결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소비자는 돈을 주로 맡기는 은행을 ‘주거래 은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은행은 소비자를 ‘주거래 고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철저히 금융상품을 분석하고 공부해야 한다. 기업이 내세우는 숫자는 그다지 정직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