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semble 9498, 66×100㎝, Korean paper Natural dyes, 1994

1983년 상파울로 비안날레에 참가하는 영예를 갖게 되는 한지화가 박철(朴哲,한지작가 박철)은 그간의 “찢음”이라는 명제에 시간성이 강조된 작품을 출품함으로서 서양화가 박철(PARK CHUL)은 종래의 작업에 대한 “접근과 회피”의 갈등 속에 우리의 세계와 우리의 실제적 실천의 내부로부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림을 찾는 휴지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그 휴지기는 “정중동”의 시기이며 새로운 대안적 회화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수반되는 시기인 것이다. 한지작가 박철(ARTIST PARK CHUL)은 한지를 통해, 프랫팅(Plating)기법에 의한 성형을 통해 부조회화라는 그만의 회화형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몰론 고도의 숙련도와 육체적 노력이 수반되는 은근과 끈기를 요하는 작업이며 중첩되는 한지에서 시간의 지속을 암시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얻어진 박철 화가 회화는 한지로 쓰인 고서의 은은한 품에 안긴 창호의 형태로 최초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 Ensemble 9551, 61×91㎝, Korean paper Natural dyes, 1995

물론 이 당시의 창호는 원래의 형상에서 많이 이지러지고 파편화한 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세월의 흐름이 한지라는 고유의 완만한 색감으로 푸근하게 감싸 안으며 아련한 향수의 저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었다.

또한 와당의 파편들이 화면에 펼쳐지면서 세월의 무상함과 소멸되어 가는 것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안착시키려는 그의(PARK CHUL) 노력의 성과를 읽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조회화의 기법적 한계로 인해 지루하게 반복되는 형상들은 못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으나 박철 작가(한지부조회화 박철)은 중첩된 이미지의 안착에 성공하면서 나열형의 화면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는 여유를 취하게 된다.

▲ Ensemble 9591, 159×159㎝, Korean paper Natural dyes, 1995

그리고 문짝, 와당, 멍석 등의 소재에서 더 나아가 바이올린이라는 소재를 더하면서 오늘의 발 철은 단순한 복고취향의 화가가 아님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악기라는 고유의 기능 외에도 마치 여인의 나신을 연상하리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는 바이올린의 형상을 통해 한국적 토속성과 상징으로서의 민속기구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서구문명의 수용을 현실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전통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상생하는 조화로움이 짙게 배인 그의(박철 화백) 화면을 통해 “가을날 창호를 바르고 국화잎으로 문양을 만들어 겨울을 대비하던 옛 정취와 바이올린의 선율, 잘 우려낸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이 묻어나올 것 같은 멋스러움을, 오늘에 다시 보고 느낄 수 있는 한가로움을 한지화가 박철(KORAN PAPER, HANJI ATIST)은 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글=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