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정부가 추진하는 보편 요금제가 국회의 선택만 남겨둔 가운데, SK텔레콤과 KT가 연이어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 출시에 나서 눈길을 끈다.

통신사들은 올해 초까지 단말기 완전 자급제 카드까지 던지며 어떻게든 보편 요금제만은 막겠다는 기류가 강했으나, 정부 주도의 보편 요금제가 윤곽을 드러내자 한 발 앞서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를 출시하고 있다.

통신사들은 보편 요금제 논란이 한창이던 당시 정부의 과도한 민간 시장 규제에 반발했으나, 결국 보편 요금제가 도입되는 상황이 되자 '어차피 맞을 매, 스스로 맞는다'는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일각에서는 SK텔레콤과 KT가 정부의 보편 요금제 출시 전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를 출시하는 것을 두고 '정부는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는 불만의 표시로 이해하고 있다.

▲ 국정기획위가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보편 요금제는 제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가계통신비 인하 공약으로 기본료 폐지를 제시했으나 이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거치며 사회적 합의기구 조성을 전제로 하는 중장기 정책으로 결정났다. 현재는 사실상 폐기됐으며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의 핵심은 약정할인 상승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후에도 가계통신비 인하 압박은 계속됐다. 통신3사는 가계통신비 인하라는 큰 그림에는 동의하나 강압적인 방식은 곤란하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유영상 SK텔레콤 전략기획부문장은 지난해 7월 "정부의 통신비 절감 대책은 사업자의 수익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으며 신광석 KT 재무최고책임자도 "통신사의 서비스 품질 유지를 위한 투자를 비롯해 5G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시급한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에) 근본적으로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다.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계통신비 정책협의회가 출범했으나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통신사들은 가계통신비 인하 압박이 더욱 심해지자 단말기 자급제 카드를 꺼내며 진화에 나섰다. 박정호 SK텔레콤 대표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단말기 자급제를 고려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보편 요금제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일종의 차악을 택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가계통신비 정책협의회는 결국 파행으로 활동을 끝냈으나 단말기 자급제 논의를 살리는 한편, 보편 요금제를 국회로 넘기는 목표는 달성했다. 어떻게든 보편 요금제만 피하려던 통신사들은 단말기 자급제라는 카드까지 던졌음에도 가장 중요한 보편 요금제 도입을 막지 못한 셈이다. 통신3사는 공동으로 법적대응에 나서는 등 반발했으나 정부의 보편 요금제 도입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결국 한 발 물러나고 말았다.

보편 요금제 도입 여부가 국회로 넘어간 가운데 통신사들의 요금제 변경 전략이 뒤를 이었다. KT는 3월 저가 요금제 사용 고객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LTE 데이터 선택(무약정) 요금제 출시에 나서고 데이터 관리 전용 앱 서비스 Y데이터박스를 공개하며 로밍 음성통화 요금 초당 과금제 도입, 선택약정 고객이 약정 만료 전 재약정 시 할인반환금을 전액 유예하는 방안을 공개했다. SK텔레콤은 약정 정책을 개선하는 등 '성의'를 보였다.

파격적인 요금제 변화를 보여준 곳은 LG유플러스다. 2월 데이터 제공량과 속도에 제한을 두지 않는 ‘속도, 용량 걱정 없는 데이터 요금제’를 출시했다. 원래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는 기준 이상의 데이터를 활용할 경우 속도 제한을 통해 트래픽에 제동을 건다. 그러나 이 요금제는 속도 제한 자체를 두지 않는다.

▲ 통신3사가 가계통신비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출처=각 사

"어차피 맞을 매, 내가 때린다?"

보편 요금제 도입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며 결국 통신3사의 대대적인 요금제 개편이 벌어졌다. 파격적인 변신을 보여준 LG유플러스는 진정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통해 상위 요금제의 판을 바꿨다는 평가다.

KT는 상위 요금제에 집중한 LG유플러스와 달리 상하위 요금제 스펙트럼을 넓혔다. KT는 5월30일 음성과 문자 무제한을 기본으로 두고 데이터만 고를 수 있는 선택 요금제를 출시하고, 새로운 로밍 요금제와 저가 요금제를 전격 공개했다.

▲ KT가 데이터ON 요금제를 설명하고 있다. 출처=KT

데이터ON 3종 요금제가 핵심이다. 기존 데이터 선택 요금제와 똑같이 유무선 음성통화와 문자는 기본 제공하며 데이터 무제한도 지원하지만, 일부 요금제는 속도 제한을 걸었다. 데이터ON 톡은 월정액 4만9000원에 매월 기본 데이터를 3GB 제공한다. 데이터ON 비디오는 월정액 6만9000원에 기존 요금제에 비해 제공 데이터를 대폭 늘려 매월 100GB를 제공한다. 데이터ON 프리미엄은 고가 요금제다. 월 8만9000원에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제공하고 속도제한도 없다.

SK텔레콤은 T플랜 5대 요금제를 18일 전격 공개했다. SK텔레콤이 공개한 T플랜은 스몰, 미디엄, 라지, 패밀리, 데이터 인피니티 요금제로 구성됐다. 스몰 요금제는 월 3만3000원에 1.2GB의 데이터를 제공한다. 월 2만원에 1GB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보편요금제와 유사하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보편요금제가 국회에 계류된 상태에서 통신사가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섰다는 말이 나온다.

미디엄 요금제는 월 5만원에 데이터는 4GB다. 라지 요금제는 월 6만9000원에 100GB 데이터를 제공한다. 미디엄 요금제 이하 요금제에 최대 400kbps 속도제어가 걸렸고 월 1만9000원을 더 내면 100GB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라지 요금제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데이터 활용이 많은 층을 라지 요금제로 묶으려는 전략을 구사한 뉘앙스다. 패밀리 요금제는 월 7만9000원에 150GB 데이터를 제공한다. 인피티니 요금제는 월 10만원에 데이터 완전 무제한이다.

▲ T플랜 요금제 개요. 출처=SKT

LG유플러스가 상위 요금제의 판을 바꾼 반면, KT와 SK텔레콤은 이에 준하는 상위 요금제는 물론 하위 요금제 개편에도 나섰다. KT의 LTE베이직과 SK텔레콤의 스몰 요금제는 사실상 보편 요금제로 봐도 무방하다. 2만원대 요금에 1GB 데이터 제공, 음성통화 200분을 보장하는 것이 보편 요금제라면 스몰은 3만3000원에 1.2GB 데이터, 음성통화는 무제한이다.

KT 베이직도 스몰과 요금이 동일하며 데이터는 1GB, 음성통화는 역시 무제한이다. 보편 요금제가 음성통화 200분이라면 두 통신사의 음성통화는 무제한이다. 가격이 보편 요금제보다 약간 비싸지만 부가혜택을 고려하면, 오히려 보편 요금제보다 유리하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끝까지 보편 요금제 방어에 나서던 SK텔레콤과 KT가 갑자기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를 출시한 이유를 두고 업계에서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엿보인다"는 평가다. 정부 민간 시장에 대한 과도한 개입을 비판했으나 끝내 보편 요금제가 도입되자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라는 선제적인 조치를 통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다는 뜻이다. 서성원 SK텔레콤 MNO사업부장 사장은 T플랜 출시 기자회견에서 보편 요금제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 스몰 요금제에 대해 "보편요금제를 의식한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지만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며 정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 SK텔레콤이 T플랜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SKT

LG유플러스 결단만 남았다

현재 통신3사 중 LG유플러스만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가 없다. 진정한 무제한 요금제를 통해 상위 요금제 경쟁의 판을 바꿨으나 보편 요금제에 준하는 하위 요금제 개편안은 발표되지 않고 있다. 최근 LG유플러스 대표이사로 온 하현회 부회장의 선택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하 부회장의 LG유플러스도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를 출시한다면, 정부의 보편 요금제 동력은 크게 상실될 것으로 보인다. LG유플러스는 이와 관련한 내부 토론을 거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통신3사가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 출시에 나서도 당분간 정부 주도의 보편 요금제 기조는 살려간다는 계획이다. 통신사들이 먼저 사실상의 보편 요금제를 출시하는 것을 두고는 "정부가 나서지 않았으면 통신사들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없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