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유럽연합(EU)이 실리콘밸리 대표기업인 구글에 안드로이드 시장 지배력 남용을 이유로 과징금 43억4000만유로(약 5조7100억원)를 부과하는 치명적인 일격을 18일(현지시간) 날렸다. 지난해 6월 시장 지배력 남용을 이유로 부과한 24억2000만유로의 2배에 육박한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은 “구글이 검색엔진의 시장 지배력을 올리려고 안드로이드를 남용했다”면서 “업계의 정상적인 경쟁기회를 박탈하고 소비자의 혜택을 가로막은 불법 행위”라고 비판했다. 구글은 즉각 항소한다는 방침이다.

EU의 구글에 대한 천문학적인 과징금 부과는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는 예외없이 엄단에 처한다’는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의 소신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최근 유럽과 미국의 대형 기업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수합병을 승인하며 친 시장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시장 지배력 남용에는 무관용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일각에서 그를 ‘세금의 여인(tax lady)으로 부르는 이유다.

EU의 구글 제재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의 영향력 확장을 우려하는 유럽의 공포와도 관련이 깊다. 구글의 유럽시장 점유율이 80%를 오가는 상태에서 유럽 토종 ICT 업계가 사실상 백기투항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EU의 천문학적인 과징금 부과보다 앱 선탑재 금지라는 시정명령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EU의 처분에 따르면 구글은 43조4000억원의 과징금을 내고 90일 안에 앱 선탑재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 후속조치가 없으면 구글은 매출의 최대 10%까지 추가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 있으나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 현금보유도를 고려하면 심각한 타격은 아니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앱 선탑재 정책은 구글 안드로이드 생태계 강화의 핵심이며, EU가 시장 독과점에 이어 구글의 핵심 정책인 선탑재 정책까지 문제삼은 것은 곧 구글의 시장 영향력 차단을 목표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더 심각한 대목은 정보 비대칭이다. 구글은 포털 사업자로 활동하며 유럽 지역의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미국 정부와도 보폭을 맞추며 활동하고 있다. 유럽은 미국의 오랜 우방국이지만 구글의 등장으로 정보 비대칭의 추가 급격히 기울어지고 있는 장면을 우려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꼬여버린 전선

업계에서는 EU의 구글에 대한 과징금 부과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 무역주의를 기점으로 촉발된 미국과 유럽의 갈등국면에 주목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시작된 패권 경쟁이 예측할 수 없는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고율관세를 무기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이 공세적으로 나오면 중국이 반격하는 모양새다.

미중 무역전쟁의 기저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 무역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은 유럽과 연합해 미국의 보호 무역주의에 맞설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유럽은 최초 중국의 공동전선 구축 요청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최근 기류가 바뀌고 있다. 류허 중국 부총리와 유르키 카타이넨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이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중국·EU 경제무역 고위급 대화를 시작하는 가운데, 미국의 보호 무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공동전선이 등장할 가능성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는 한편 중국과 유럽의 공동전선 구축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EU가 미국과의 담판을 일주일 앞두고 전격적으로 구글 과징금 처분을 내린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오는 25일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관세 갈등 해소를 위한 담판에 돌입한다. 미중 무역전쟁의 불똥이 유럽으로 튀며 EU가 미국과의 담판을 앞두고 실리콘밸리 대표기업에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한 대목은 향후 미국과 중국, EU의 협상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못할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전자 ICT 업계 ‘시계제로’

미중 무역전쟁의 핵심은 중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스마트제조 2025에 있다.

중국은 지금까지의 대외전략인 도광양회를 버리고 대국굴기를 선언하며 ICT 전자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스마트제조 2025에 담아냈다는 평가다. 중국은 스마트제조 2025를 통해 3개의 목표를 세웠다. 1단계는 2015년부터 2025년까지 양적인 제조강국에서 벗어나 질적인 스마트 제조 플랫폼을 가진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노동집약적 제조국가에서 스마트 팩토리 등 자동화, 인공지능 전략을 구사해 제조 인프라를 개선하는 방향이다. 2단계는 2026년부터 2035년까지 글로벌 스마트 제조 시장에서 최소한 중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며 3단계는 2036년부터 2045년까지 글로벌 무대를 석권하는 것이다.

중국은 스마트제조 2025를 위해 9개의 세부목표를 세웠다. 제조업 혁신력을 제고하고 IT기술과 제조업의 융합, 친환경 제조업 육성 등이 포함됐다. 10대 전략사업은 IT와 로봇, 에너지, 스마트팜 등 미래IT기술을 총망라하며 5대 중점 프로젝트를 통해 큰 그림을 그렸다.

패권국가에 가장 가까이 있는 미국은 중국이 추진하는 스마트제조 2025를 용인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단행한 1차 25% 관세부과 물품 중 무려 818개가 전자와 항공, 부품 등 스마트제조 2025에 필요한 자원에 집중된 이유다. 미국이 무역전쟁을 일으키며 중국의 스마트제조 2025를 크게 의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중 무역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중국 내부의 시진핑 주석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가운데, 두 나라는 전자 ICT 업계로 대표되는 미래 경제 패권을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국 보호 무역주의로 촉발된 미중 무역전쟁의 연장선에서 EU의 전격적인 구글 제재가 단행된 가운데, 국내업계는 그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당분간 큰 여파는 없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지만, 유럽까지 참여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1월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세이프가드 발동이라는 커다란 난관을 맞았으나 원만하게 넘기는데 성공했다.

미국 현지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 브랜드 선호도가 여전한데다, 무엇보다 미국 기업 월풀의 헛발질이 주효했다. 월풀은 자국 일자리 창출 등을 이유로 트럼프 행정부에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대한 세이프가드 발동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미국으로 들어오는 원자재 가격 인상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다. 세이프 가드 발동으로 미국 소비자들만 전반적으로 비싼 세탁기를 구매하게 됐으며, 월풀은 올해 1분기 9400만달러의 순이익만 거두며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월풀의 지난해 1분기 순이익은 약 1억6000만달러다.

문제는 지금이다. 미국이 중국 수입품 관세 품목을 확장하는 가운데 중국산 세탁기와 TV, 냉장고를 포함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대부분의 가전제품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제작해 미국에 수출하지만 일부 제품은 중국에서 제작되어 미국에 수출된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관세부과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상황에 따라 올해 1월 세이프 가드 이상의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등 중국에 생산기지를 구축한 모든 업종이 위기다.

미중 무역전쟁이 길어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의도하지 않은 ‘유탄’을 맞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U는 18일 미국이 철강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지금까지 미국에 수출되던 철강 제품들이 유럽으로 몰린다며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한국도 세이프가드 대상에 포함되며, EU의 23개 철강 품목 중 한국기업의 주력인 판재류가 다수 들어가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보호 무역주의가 강화되며 유럽도 대응하기 위한 카드를 빼드는 가운데, 두 거인의 싸움에 한국기업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점점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