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에서 한남고가를 2018년 7월 10일부터 철거하려 했으나, 계획 하루 전날인 7월 9일 돌연 연기됐다. 그래서 필자는 한남고가가 도시풍수적으로 어떤지 한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한남고가는 남산을 기준으로 남산1호 터널로부터 시작해 한남고가를 거쳐 한남대교로 이어져 강남으로의 진입과 경부고속도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도시의 도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잠시 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1969년 1월 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 해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한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그리고 신년사가 발표된 지 6일 후 1월 7일 당시 김현옥 시장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당시 발생한 김신조 침투사건으로 인한 대비책이었다. 그래서 그 해 3월 4일에 평화 시에는 교통수단으로 쓰고 전시에는 30~40만명을 수용하는 대피소로 사용하는 남산1,2호 터널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남산1호 터널은 3.1로에서 보광로에 이르는 길이 1530m 너비 9m 높이 4.5m이고 3월 13일 기공식이 거행됐다. 공사비 계획은 총 10억100만원으로 당시 한국신탁은행이 부동산 설비 신탁사업으로 실시하고 개통 후 통과차량 1대당 60원씩의 통행료를 받아 1년간 약 4억5000만원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며 출발했다.

이후 남산1호 터널이 개통된 것은 1970년 8월 15일이었고 예상보다 더 많은 총 약 16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업의 미숙과 미비로 부채가 누적되어 1호 터널과 북악터널은 서울시가 1975년 1월 13일 인수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1호 터널은 이외에도 강남으로의 인구이동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으나 당시엔 인구이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남산1,2,3호 터널은 남산의 생태계를 훼손한 요인으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남산터널 개통 후 총을 맞고 시해된 박정희 대통령이라든가, 청계천을 까뒤집어 감옥에 간 이명박 대통령은 국운의 기운이 담긴 명당을 풍수적으로 훼손해 재앙을 입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후 한남2고가는 1976년 설치됐다. 한남대로와 한남대교를 연결하는 기능이 있으며 한남오거리 위를 지나고 있다. 당시 한남고가는 국가적 사대문 안의 인구분산 정책에 의한 강남권 개발 및 국가경제력이 커지는 산업발달로 인해 점차 차량이 몰리고 증가하면서 그 필요성이 대두되어 추진 및 설치되었다. 이 공사는 정확히 1976년 8월 말부터 그해 12월 말인 총 5개월 만에 완료된 공사로써 상당히 빠르게 완료됐다. 1977년 1월 1일 준공식을 하게 되는데 당시 서울시장은 구자춘이었다.

그렇게 1977년을 기준으로 현재 2017년까지 총 40년을 버틴 한남고가는 현 박원순 시장의 계획으로 철거의 운명을 맞이하려다 다시 보류된 상태다.

이렇게 경제개발과 사대문의 인구분산을 목적으로 한 강남권 개발이라는 목적을 지닌 남산1호 터널과 한남고가는 40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경제 대국으로써 하나의 상징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 단점도 있다. 1호 터널과 2호 터널 그리고 3호 터널은 엄청난 차량의 증가에 따른 배기가스로 인해 서울 도시오염의 상당한 주범이 되었다. 또한 남산의 자연생태계를 파괴하고 훼손한 인간의 이기주의 상징이기도 하며, 더불어 천정부지로 치솟은 강남의 땅값은 평생 노력해도 살 수 없는 절대적 부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에게 허탈감을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남산터널과 한남고가는 대한민국 압축성장의 커다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한남고가는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고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노후했기 때문에 철거가 당연할 수 있지만, 강남 진입의 절대적 차량통행과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로써 그 대안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 글은 총 2회로 나누어 1회엔 역사와 배경, 2회엔 현재의 남산1호 터널과 한남고가 그리고 해당 지역 도시풍수를 이야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