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1980년대, 삼성전자는 외국의 엔지니어를 짧은 기간에 은밀히 불러 기술을 전수받으며 실력을 쌓았다. 특히 일본의 엔지니어는 현지 회사에서 퇴근하는 금요일 저녁 국내로 초빙받아 기술을 전수하고 일요일 오후에 떠나고는 했다. 달을 보며 들어왔다가 달을 보며 나간다는 이른바 달빛 관광(Moonlight Sightseeing)이다.

변칙에 가까운 전략이지만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삼성전자 직원들이 일본에 출장을 가 기술을 배우려 해도 막상 핵심 기술은 공개되지 않자, 각자 부분적으로 얻은 설계도면을 외워 숙소로 돌아가 머리를 맞대며 완성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통용되던 시기다. 그만큼 절박했다. 그 절박함이 한국을 반도체,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 달빛관광으로 외국의 기술을 전수받던 때가 있었다. 출처=픽사베이

두뇌유출 심각… 경고등

일본의 전자왕국, ‘주식회사 사무라이’ 신화가 흔들리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은 글로벌 ICT 전자업계의 최강자로 급부상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02년 아시아 전자기업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기사를 통해 “사람들은 1997년까지 소니와 미쓰비시의 제품을 구매했으나, 밀레니엄이 된 후 삼성전자를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0년대 한국은 달빛관광 등을 불사하며 얻어낸 절정의 호황기를 누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발 밑에서는 서서히 경고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글로벌 무대에 우뚝 선 한국 ICT 전자업체의 인재들을 빼내려는 외국의 공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역 달빛 관광 사태’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의 인재욕심이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각 국의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가까운 한국은 주요 타깃이 됐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 2008년 천인(千人) 계획을 수립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 고급 인재 2000명을 10년 동안 유치하는 작업에 나서며 더욱 탄력을 받았다. 각 국에 흩어진 중국인 유학 인재를 빨아들이는 한편 중국과 비슷한 노동집약적 산업 생태계를 가진 한국의 인재도 덩달아 유치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 육성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46위를 기록, OECD 국가 중 크게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 인재유입능력은 49위를 기록했다. ‘나가는 인재는 많고, 들어오는 인재는 적다’는 통념이 수치로 확인된 셈이다.

▲ 중국으로의 인재유출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출처=픽사베이

현재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중국으로의 인재유출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시진핑 국가주석 시대를 맞아 중국은 더욱 강력한 인재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한국 인재를 주로 그룹 내 투자회사, 혹은 자회사로 취업시켜 국내의 동종업종 재취업 규정을 교묘히 피해가는 꼼수도 불사하고 있다.

최근까지 국내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중국 스카우트를 제안받은 경험이 있는 A씨는 “제조분야를 담당하던 동료가 중국 기업의 제안을 받아 넘어갔는데, 첫 직장이 금융 자회사로 잡혀 놀랐다”면서 “이직할 경우 동종업계에 취직하면 안 된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들었다. 업무는 동일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인재욕심은 200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최근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는 말도 나온다. 한국의 ICT 전자 인프라가 글로벌 무대를 호령할 때 약간의 인재유출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위기상황이기 때문이다. ICT 이니셔티브 연구소의 서석민 연구원은 “호황기에 인재유출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다”면서 “지금은 반도체만 빼고 국내 제조업 전반이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인재유출 후폭풍이 지금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LG디스플레이다. LG디스플레이는 최근 중국 BOE에 일격을 당하며 글로벌 LCD 시장에서 주춤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구조조정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사실무근이라는 설명이지만 만약 구조조정이 실제 이뤄진다면 직원들이 중국 등으로 넘어가 산업 생태계 전반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물론, 최신 ICT 시장에서도 인재유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영역이 5G 네트워크 기술로 두각을 보일 가능성이 높은 가상현실 시장이다. 중국은 2006년부터 국가 중장기 과학 기술발전 요강을 통해 정부 차원의 글로벌 인재 확보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인재에게 10년간 비자를 면제하는 등의 파격적인 대우를 한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어림잡아 수십명은 (중국으로) 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재유출이 벌어지고 있다.

▲ 중국 BOE가 LG디스플레이가 버티고 있는 LCD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출처=BOE

왜 떠날까?

중국으로 떠나는 국내 인재들은 높은 연봉과 처우에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중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투자를 벌이며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는 중이다. 연구개발이나 실제 비즈니스 환경이 선진적으로 구축됐다는 말이 나온다.

최근 국내 제조업이 침체기를 걸으며 핵심 인력이나 개발자에 대한 처우가 부족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 대기업 SI업체에 근무하다 스타트업을 설립한 B씨는 “국내의 전자 ICT 업계는 아직도 ‘개발자를 갈아먹는다’는 표현이 통용될 정도로 근무환경이 나쁘다”면서 “주 52시간 근무 등 다양한 실험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본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계속되면 결국 인재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으로 이동한 인재들이 이른바 ‘단물’만 빨리고 버려질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맞는 말이지만 전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판단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용만 당하고 버림을 받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례는 주로 기술 노하우가 쉽게 복제되는 영역에서만 벌어지기 때문이다.

최첨단 ICT 전자 영역은 대부분 기술진화의 한계가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3단계에서 5단계, 7단계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를 키우려면 당연히 1단계부터 두각을 보인 인재가 제격이다. 1단계 인재는 3, 5, 7, 10단계를 넘보며 일한다.

인재유출이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만 정부에서는 각 산업별 뚜렷한 현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인재 공동화 현상이 벌어지며 국가 핵심 경쟁력도 떨어질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반면교사로 회자되는 것이 대만 영상사업이다. 대만은 한때 아시아 콘텐츠 허브로 군림했으나 중국으로의 인재 유출을 막아내지 못했고, 현재는 영상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