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국이 기어이 망 중립성 폐지에 돌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주요 외신은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지난해 12월 망 중립성 폐기안을 통과시킨 후 11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전역에서 정식으로 망 중립성 폐지 정책을 적용했다고 보도했다. 망 중립성은 통신사와 같은 네트워크 사업자들이 서비스를 운용하며 특정 서비스와 콘텐츠 사업자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망 중립성의 성지로 여겨졌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실리콘밸리 ICT 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선된 후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해졌다. 톰 휠러 FCC 위원장 시절 망 중립성은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상징했으며, 이를 기초해 만들어진 오픈 인터넷 정신(인터넷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열려야 한다)은 일종의 금과옥조와 같았다.

망 중립성 폐지는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까? 네트워크 사업자는 꽃놀이패를 쥐었다. 미국에서 망 중립성 폐지에 전력을 다했던 진영이 통신사라는 점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부터 친 통신 인사로 분류되며, 그는 지난 2월 유럽에서 열린 MWC 2018에서 망 중립성 폐지가 새로운 네트워크 시대의 혁신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망 중립성 폐지에 따라 통신사들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반면, 구글과 넷플릭스 등 ICT 플랫폼 사업자들은 ‘표면적으로’ 직격탄을 맞을 전망이다. 통신사들이 트래픽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거나 트래픽을 많이 사용하는 콘텐츠 사업자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콘텐츠 시장에서 통신사 주도의 대형 인수합병이 빠르게 벌어지는 장면과도 연결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AT&T가 최근 타임워너 인수를 위한 9부 능선을 넘은 상태에서, 통신사들은 소위 제로레이팅을 통해 시장의 균형에 개입할 여지가 높아졌다.

망 중립성 폐지는 거대 담론이며, 이를 두고 한쪽의 의견에만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실제로 통신사들이 초연결 시대를 맞아 글로벌 ICT 기업의 플랫폼 사업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며, 네트워크 사업자가 존재하지 못하면 ICT 기술 자체도 성립될 수 없다. 망 중립성 폐지와 강화를 저울질하며 최대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다만 망 중립성 폐지에 따라 오픈 인터넷 정신이 무너지는 대목은 아쉽다. 망 중립성 폐지가 네트워크 사업자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고려사항이 있지만, 망 중립성 폐지로 인해 인터넷을 공공재로 인식하는 오픈 인터넷 정신의 근간이 허물어지는 것은 ICT 진보를 걸어온 인류 역사의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오픈 인터넷 정신의 실종은 새로운 혁신가의 등장도 막을 수 있다. 이미 네트워크 사업자를 활용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구글과 넷플릭스 등은 망 중립성 폐지로 약간의 타격을 입겠지만,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위기를 무난하게 넘길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 중립성 폐지와 함께 태동하기 시작한 혁신적 ICT 플랫폼 기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은 구글과 넷플릭스만큼의 돈과 권력도 없고, 무엇보다 통신사의 제로레이팅 등을 포함한 대공세를 버틸 체력도 없다. 제2의 구글, 넷플릭스가 등장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 오픈 인터넷 정신의 죽음이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기존 망 중립성 강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방송통신위원회가 미국의 FCC를 본떠 만들어진 조직인 것처럼, 우리는 미국의 ICT 환경을 답습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망 중립성 폐지가 마냥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망 중립성 폐지를 통해 닥쳐올 오픈 인터넷 정신의 종말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