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국이 기어이 망 중립성 폐지에 돌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주요 외신은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지난해 12월 망 중립성 폐기안을 통과시킨 후 11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전역에서 정식으로 망 중립성 폐지 정책을 적용했다고 보도했다. 오픈 인터넷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

망 중립성은 통신사와 같은 네트워크 사업자들이 서비스를 운용하며 특정 서비스와 콘텐츠 사업자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망 중립성의 성지로 여겨졌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실리콘밸리 ICT 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선된 후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해졌다. 톰 휠러 FCC 위원장 시절 망 중립성은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상징했으며, 이를 기초해 만들어진 오픈 인터넷 정신(인터넷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열려야 한다)은 금과옥조였다.

▲ 미국에서 열린 망 중립성 폐지 반대 시위. 출처=플리커

균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의 등장에서 시작됐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높아진 반 실리콘밸리 정서에 힘입어 공화당이 FCC를 장악했고, 지난해 12월 위원들이 전격적으로 표결에 돌입해 3대2로 폐지를 결정했다. 실리콘밸리는 강력히 반발했다. 구글을 필두로 망 중립성 폐지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미적이던 애플도 지난해 9월 "오픈 인터넷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ICT 기업들은 망 중립성 폐지가 곧 자신들에 대한 규제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친 통신사 인사로 꼽힌다.

망 중립성이 폐지되면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통신사(Internet Service Provider, ISP)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트래픽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거나 트래픽을 많이 사용하는 콘텐츠 사업자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과 넷플릭스 등 ICT 플랫폼 사업자들은 직격탄을 맞을 전망이다.

최근 미국 콘텐츠 시장에서 통신사 주도의 대형 인수합병이 빠르게 벌어지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AT&T가 최근 타임워너 인수를 위한 9부능선을 넘은 상태에서, 소위 제로레이팅을 통해 시장의 균형에 개입할 여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혁신의 실종이다. 망 중립성이 폐지되면 제2의 구글이나 넷플릭스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12월17일 “글로벌 ICT 기업들이 망 중립성 폐지에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보도를 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망 중립성 폐지 논란이 불거질 당시에는 열성적으로 반대했으나 막상 망 중립성 폐지가 결정된 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NYT를 비롯한 다수의 외신들은 글로벌 ICT 기업들의 침묵을‘시장을 선점한 거인의 여유’로 해석했다. 망 중립성이 폐기되면 ICT 플랫폼 기업들은 통신사에 망 사용대가로 돈을 더 내야 하지만 그들은 이미 거인이고, 시장을 선점했으며 무엇보다 돈이 많다. 이들에게 망 중립성 폐지는 뜻밖의 호재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사업의 유지비용은 더 들어가겠지만, 제2의 구글과 넷플릭스는 망 중립성에 가로막혀 혁신적인 서비스를 출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망 중립성이 강력한 도전자의 등장을 막아준다는 분석이다.

망 중립성 폐지가 오픈 인터넷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장면도 부담이다. 월드와이드웹(WWW)에서 시작된 오픈 인터넷 정책은 인터넷을 일종의 공공재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망 중립성은 인터넷의 활용을 좌우하는 ISP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해 '인터넷=공공재'라는 공식을 부정한다. 물론 통신사들이 망 중립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며, 반대급부에서 많은 ICT 기업들이 새로운 플랫폼 사업자로 활동하며 과실을 챙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망 중립성 폐지로 오픈 인터넷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은 심각한 패착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국내 정책은 망 중립성 강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당분간 이 기조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망 중립성이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