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외부는 물론 내부적으로도
이 회장은 ‘얼굴없는 오너’로 회자된다.
오전에 장충동 태광산업 사옥으로 출근해
오후엔 계열사를 돌아다니지만
수행비서 없이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매출 1조8000억원, 30%대의 낮은 부채비율, 재계 순위는 30위권’.
태광산업을 주력사로 하는 태광그룹의 현주소다. 섬유기업에서 출발해 금융·방송시장의 새 강자로 떠오르며 대기업 집단의 ‘중심’에 바짝 다가서고 있는 태광그룹. 하지만 최근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로비’ 의혹의 진원지가 태광그룹 계열사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때 아닌 ‘암초’를 만났다.

그동안 태광그룹은 1~2년 사이에 한 번꼴로 굵고 작은 ‘논란’에 휩싸여왔던 게 사실. 그러나 그때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난국을 타개했던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이었기에 이번 논란의 종지부를 어떻게 찍을지에도 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다시 불거진 ‘정·관계’ 연루설
‘정·관계 커넥션’의 화살이 태광그룹에 본격적으로 겨눠진 것은 지난 3월 말 터진 ‘성접대 로비 의혹’ 사건이 발단이다. 태광그룹 계열의 티브로드 직원이 청와대 및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 직원 3명에게 신촌의 한 술집에서 ‘성접대 로비’를 펼쳤다는 게 의혹의 시나리오다.

국내 1위 케이블TV 사업자(SO)인 티브로드는 전국에 15개 종합SO를 소유하고 있으며, 지난 3월 서울지역 케이블TV인 큐릭스의 지분 70%를 2500억원대에 인수해 방통위의 최종 승인을 앞두고 있었던 터.

따라서 티브로드 직원이 케이블TV 인수·합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방통위·청와대 관계자를 상대로 큐릭스 합병 승인을 위한 ‘사전작업’을 벌였을 것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이들이 만났던 시기가 공교롭게도 티브로드와 큐릭스의 합병 최종 승인 예정일인 3월31일을 불과 5일 앞둔 시점인 것 역시 의심이 가는 대목.

하지만 경찰은 청와대 행정관 2명에겐 뇌물수수 혐의로, 방통위 및 티브로드 직원에게는 뇌물 혐의를 적용하면서도 “청와대나 방통위에 대한 조직적인 로비가 아닌 향후 청탁을 위한 성격이 짙다”며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보다 앞서 태광그룹은 청와대 인사로 인해 이미 ‘정·관계 암초’에 부딪힌 바 있다.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는 반정부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사건으로 막으라’는 지시를 내린 ‘청와대 이메일’ 파동의 장본인인 이성호 전 청와대 행정관이 태광그룹과 연루된 때문이다.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아들인 이 전 행정관은 미 경영학 석사 과정(MBA)을 졸업하고 티브로드에 입사해 티브로드 강서방송 마케팅팀장으로 재직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이 전 행정관이 티브로드와 청와대를 연결한 ‘고리’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샀다.

사실 태광그룹을 향한 ‘정·관계 연루’ 의혹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회장의 어머니이자 창업주 이임용 회장의 부인인 이선애 씨의 남동생이 이기택 부의장(전 민주당 총재)인 탓에 태광그룹은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부터 강도 높은 세무사찰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베테랑 세무조사 요원들이 투입돼 몇 날 며칠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에 전례없는 일로 전해지고 있다.

태광그룹의 금융계열사인 흥국생명.

‘바다이야기’ 수혜, ‘장하성 펀드’ 대립도
이처럼 이호진 회장의 경영 인생에서 ‘암초’는 늘 따라다녔다. 아무래도 기업스타일 자체가 외부에 잘 드러내지 않는 데다 창업주인 이임용 회장부터 이어진 ‘조용한 경영’ 탓인지 유독 ‘논란’의 중심에 많이 섰다.

지난 2006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행성 오락 ‘바다이야기’와 관련, 태광그룹 계열사인 한국도서보급이 연루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당시 돈으로 환전되는 ‘칩’ 역할을 하던 상품권이 한국도서보급이 발행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모 회사인 태광그룹과 이 회장은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었다.

이에 대해 태광그룹 측은 “상품권 판촉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우리도 이용당한 처지”라고 회고했다.

같은 시기인 2006년에는 일명 ‘장하성 펀드’로 불리는 한국기업지배구조 펀드와의 분쟁에도 휘말렸다. 장하성 펀드가 지분을 매입하면서 기업지배 구조 개선 요구를 해와 태광산업이 결국 수용한 것.

장 펀드는 그해 8월 이호진 회장이 태광산업 소유였던 티브로드 천안방송 지분 67%를 편취한 부분과 관련해 대한화섬에 주주명부열람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등 경영진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태광그룹은 5% 수준의 지분을 갖고 있는 장 펀드에 굴복해 지배구조 개선에 합의했었다.

지난해 6월에는 부동산 거래와 관련해 ‘의혹’의 꼬리가 이 회장을 흔들기도 했다. 그룹 계열사인 동림관광개발이 이 회장이 소유한 토지를 거액에 사들인 것인데, 당시 동림관광 측은 이 회장 소유의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일대 임야를 106억원에 매입했었다.

하지만 자본금 10억원의 기업이 106억원의 토지를 매입한 것을 놓고 이 회장이 부동산을 통해 개인재산 불리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혹이 커졌고, 태광그룹 측은 회사가 토지를 구입할 수 없던 상황에서 이 회장이 먼저 토지를 구입하고 규제가 풀린 후 회사가 매입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 회장이 처음 산 토지대금과 동림에 토지를 되판 금액이 일치한다. 차익을 노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박한 바 있다.

이 회장의 ‘굴곡 많은 인생’은 올 들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올 초 태광산업이 지난해 534억원에 달하는 순손실을 내고도 주주들에게 현금배당한 것을 놓고 ‘오너를 위한 배당잔치’라는 비판을 받은 것.

특히 지난 2007년 408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1년 만에 다시 적자로 전환된 상황에서 나온 현금배당이라는 이유로 논란의 여파는 컸다.

통상 기업이 수익을 못 낸 상황이면 현금배당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게 증권가의 일반론. 하지만 태광그룹 측은 “소액주주를 위한 배당이고 이 회장 일가에 돌아가는 현금배당액도 2억원이 채 안 되는 적은 액수”라고 밝혔다.

과감한 M&A로 그룹 체질 바꿔
국내 재계 순위 30위권에다 4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총수치고는 이호진 회장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은 ‘얼굴 없는 경영자’로, 태광그룹은 ‘은둔의 기업’으로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장은 1993년 태광그룹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해 2004년 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언론과 접촉한 적이 없으며 그룹 행사나 외부 행사에서도 일절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장의 사진 역시 각 언론이 따로 찍은 사진은 전혀 없고 10여년 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예전 사진 한 장만이 활용될 뿐이다.

이 회장은 재벌 2세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특별한 ‘이너서클’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코넬대 경영학과를 나온 이 회장은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일본 산사스식품 회장) 씨의 맏딸 신유나 씨와 결혼해 슬하에 현준·현나 남매를 두고 있다.

아주 친한 지인 외에는 잘 안 만나고 정·관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룹 측 관계자들의 얘기다.

그가 태광그룹 경영 일선으로 나선 것은 1996년 11월 창업주인 아버지 이임용 회장이 사망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흥국생명 이사로 재직했다.

그룹 회장 자리는 이임용 창업주의 처남인 이기화 회장이 넘겨받았고 장남인 석진 씨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2002년 이기화 회장이 사임하고, 석진 씨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2004년 회장직에 오른 것.

그룹 외부는 물론 내부적으로도 이 회장은 ‘얼굴 없는 오너’로 회자된다.
오전에 장충동 태광산업 사옥으로 출근해 오후엔 계열사를 돌아다니지만 수행비서 없이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다 보니 그의 얼굴을 모르는 계열사 직원들도 수두룩하다.
흥국생명 건물에는 24층 임원실을 들르는데 이곳에서도 이 회장과 마주치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 게 흥국생명 관계자의 전언.

하지만 이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이면서도 과감한 M&A를 통해 그룹 체질을 섬유에서 금융·방송으로 개선시키는 등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특히 SO업계에서 1위로 뛰어오를 정도로 공격적인 M&A를 펼쳤다. 올 초 SO업계 6위인 큐릭스를 인수한 것도 방송분야 시장에 대한 이 회장의 강한 야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금융 부분에서는 기존 흥국생명과 고려상호저축은행에 추가로 쌍용화재(현 흥국화재), 흥국투자신탁운용, 피데스증권(현 흥국증권), 예가람저축은행 등을 잇달아 사들였다.

김진욱 기자 actio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