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작곡가 고 이영훈은 2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세련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가수 이문세의 명곡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는 노래는 ‘라일락 꽃향기 맡으며’로 시작한다.

필자에게 라일락 꽃향기는 잔인한 봄과 연관되어 있다.

6년간의 의대 생활에서, 본과 1학년의 봄은 가장 잔인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강의, 두꺼운 영어 원서, 물리적인 절대량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는 제아무리 천재라도 머릿속에 우겨 넣을 수 없는, 셀 수도 없는 해부학·의학용어의 암기 또 암기. 반복된 시험,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아침부터 밤까지의 도서관에서의 하루!!

때마침 시체 해부가 시작되고, 라일락 향기가 교정을 휘감는다.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시체조직에 침투시켜 놓은 포르말린 냄새를 뒤로 하고 해부학교실 건물을 내려와 도서관으로 향하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라일락 향기.

그 라일락 향기에 지면 휴학이고, 이기면 견뎌내는 것이 본과 1학년의 숙명이었다. 잔인한 4월에는 삶 같지 않은 삶에 회의를 느끼는 동급생들의 휴학이 줄을 이었다. 매년 그랬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나약했던 그들이 더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본과 1학년이면 스물두 살, 정말 연애하기 좋은 청춘의 시간은 음습한 도서관에서 썩어 들어갔다. 가슴은 메마르고 머리는 비대해졌다. 머리를 툭 치면 해부학 용어가 줄줄 새어 나올 기세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고통스럽던 시간은 정지화면으로 만든 액자처럼 추억이 되었다.

필자의 뇌에 본능처럼 각인된 해부학 지식의 덕을 보며, 그때 주저앉지 않고 해부학 A학점을 받아낸 필자 스스로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돌출입수술, 광대뼈수술, 사각턱수술, 양악수술을 할 때, 턱끝신경(Mental Nerve), 하치조신경(Inferior Alveolar Nerve), 하안와신경(Infraorbital Nerve), 안면신경의 측두가지, 하악가지(Temporal, Mandibular Branch of Facial Nerve) 등의 신경이나, 안면동맥(Facial Artery), 대구개동맥(Greater Palatine Artery), 키셀바흐 혈관총(Kisselbach Plexus) 등의 혈관들의 위치를 투시라도 하듯 머릿속에 그리고 수술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돌출입수술과 같은 얼굴뼈 수술은 사실 의학이라는 과학의 테두리 내에서, 해부학적으로 안전한 부위를 절골하고 옮기고 다듬고 고정하는 수술이자 하나의 예술이다. 명작이라고 할 만한 결과는 멋진 수술 명칭이나 방법, 기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도의의 냉철한 지식, 풍부한 경험, 미적인 감각, 그리고 수술 솜씨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해부학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신경손상이나 출혈 등의 합병증도 적절히 피할 수 있다.

며칠 전 필자를 찾아온 20세의 남자 환자는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정말 아무렇게나 막 살았고, 공부라는 건 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다가 이루고 싶은 꿈이 생겨서 행복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꿈 두 가지는 반드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필자에게 돌출입수술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그에게 원하는 대학을 묻자 콕 집어 서울대 의대라고 했다. 대견하고 반가웠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올해 모 대학 의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고1 때부터 초등학교 수학을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였는데, 결국 수능을 정말 잘 봤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합격한 그 의대 입학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꿈이 서울대 의대이기 때문이란다. 아아… 무모한 걸까? 단순한 걸까? 아니, 순수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너무 순수해서 필자의 마음이 스산했다.

그리고 집에서는 그가 안 다닐지도 모를 대학을 등록해줄 여력 또한 없었다고 했다. 환자는 수능 만점을 받는 것이 구체적인 목표라고 했다. 필자는 그 환자에게 공부할 때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겠느냐고 물었다. 진심이었다. 후일 그가 꿈을 이룬다면, 필자가 개인적으로 장학금이라도 후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모든 꿈이 뜻대로 이루어져, 언젠가 그 친구가 ‘입매가 특히 잘생긴’ 의대 본과 1학년이 된다면, 시체 해부가 끝나고 도서관 앞을 지나며 라일락 향기의 유혹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견뎌내길 빈다.

오늘은 돌출입수술과 동시 광대뼈수술이 있는 날이다.

수술하면서 듣고 싶은 음악은 독자 여러분의 예상대로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