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게임 업체 그리(Gree)의 ‘던만추’(DanMachi)가, 어린 시절부터 포켓몬과 유희왕(遊戯王)을 보며 자란 미국의 20-30대 게이머들을 사로잡고 있다.    출처= 그리(Gree)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일본 비디오 게임사들이 최신 출시 게임에서 개성 넘치는 인물들과 스토리로 보다 많은 미국 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보도했다.

도쿄의 스마트폰 기반 게임 회사인 그리(Gree Inc.)는 지난 4월, 회사의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RPG: 플레이어가 게임 속의 주인공이 되어 가상의 세계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퍼즐을 풀어가는 방식의 게임) ‘던만추’(DanMachi)가 일본에서보다 미국에서 40% 이상 더 팔렸다고 발표했다. 14년 역사의 이 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던만추는 미국 게이머들도 수용하기 좋은 최신 일본풍 비디오 게임이다.

도시와 지하 감옥의 미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동명 소설과 TV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이 게임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컴퓨터 생성(CG) 그래픽도 아닌 데다가 그리라는 회사가 미국 게임 애호가들에게 인기 있는 제품을 만든 회사가 아니어서, 이 게임의 성공은 투자자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 게임의 미국 시장 성공 소식에 이 회사의 주가는 9% 상승했다.

도쿄의 게임 컨설턴트인 세르칸 토토는 “10년 전만 해도 이런 성공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제 일본 게임 회사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캡콤(Capcom Co.)도 5월 초 게임 ‘몬스터 헌터: 월드’(Monster Hunter: World)가 1월 후반부터 2개월 만에 790만개가 판매되면서 회사 역사상 가장 큰 히트를 했다고 발표했다. 시장조사기관인 NPD 그룹에 따르면, 이 회사의 ‘몬스터 헌터: 월드’가 올해 첫 2개월 동안 미국 게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3월 말로 끝난 회계연도에 캡콤의 게임 매출은 전년 대비 26% 증가한 740억엔을 기록했다.

또 다른 일본 격투 게임인 ‘드래곤 볼 파이터즈’(Dragon Ball FighterZ)도 제작 회사인 반다이 남코 홀딩스(Bandai Namco Holdings Inc.)의 미국 매출을 22%나 끌어 올리며, 역시 3월 말로 끝난 회계연도에 790억엔의 매출을 달성했다.

지금까지는 ‘슈퍼 마리오’ 같은 게임을 개발한 닌텐도 같은 몇몇 회사만이 일본산 비디오 게임 시장을 이끌어 왔지만, 현재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회사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회사들로, 미국의 탑 게임 업체들이 추구하는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 스타일보다는 애니메이션 느낌을 제공하며 틈새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반다이 남코 관계자는 ‘드래곤 볼 파이터즈’의 캐릭터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실제 인간의 동작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영화와 비슷한 요소를 사용해 스타일링했다고 말했다.

그리의 ‘던만추’ 미국 버전은 일본어를 쓰는 원작에 영어 자막을 추가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영어를 쓰는 배우가 일본어 대사를 더빙한 기존의 방식과 대조적이다.

세가 새미 홀딩스(Sega Sammy Holdings Inc.)도 일본 만화에서 따온 캐릭터들이 도쿄의 시부야구에서 악마를 추적하는 내용의 게임인 ‘페르소나 5’(Persona 5)를 성황리에 출시했다.

신작(新作) 콘솔 게임 ‘니어: 오토마타’(NieR: Automata)를 미국 시장에 깜짝 출시해 업계를 놀라게 했던 스퀘어 에닉스 홀딩스(SQuare Enix Holdings Co.)의 사사키 미치히로 기획 담당 전무는 “서양 게임 팬들이 일본의 롤플레잉 게임을 즐겨 오긴 했지만, 최근 들어 스토리와 캐릭터 디자인까지 칭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최근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리즈인 ‘드래곤 퀘스트 XI’(Dragon Quest XI)의 서양판도 9월에 출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일본 게임의 미국 판매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미국 시장은 아직까지는 액티비전 블리자드(Activision Blizzard Inc.)의 1인칭 슈팅 게임(자기가 직접 총 쏘는 사람이 되는 컴퓨터 게임) 프랜차이즈 ‘콜오브듀티’(Call of Duty)와 일렉트로닉 아트(Electronic Arts Inc.)의 스타 워즈, FIFA, 매든 풋볼(Madden NFL) 같은 미국 회사의 게임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게임들은 뭔가 다른 것을 찾는 팬들의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밴쿠버에 사는 32세의 네트워크 엔지니어 스티브 도만스키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기억에 남을 만한 음악 때문에 일본 게임을 구매했다고 말했다.

“일본 게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주위에 날아다니는 나비 같이 사소한 디테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본 게임이 미국에서 타깃으로 삼고 있는 대상은 20대에서 30대 게이머들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일본 만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그리고 포켓몬과 유희왕(遊戯王)의 캐릭터 상품들을 가지고 놀며 자란 세대들이다.

게임 컨설턴트 세르칸 토토도 “나는 1990년대에 독일에서 자라서 내게 일본은 멀리 있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나라였지만, 내 사촌들까지도 모두 만화영화 포켓몬 시리즈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인지도 때문에 니폰 이치 소프트웨어(Nippon Ichi Software Inc., 株式会社日本一ソフトウェア) 같은 소규모 일본 퍼블리셔들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이 회사는, 다크 보이드라는 마왕에 대해 복수하는 롤플레잉 게임 마계전기 디스가이아 5(Disgaea 5)의 히트로 미국에서의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

도쿄 에이스 연구소(Ace Research Institute)의 야스다 히데키 애널리스트는 “니폰 이치의 성공은 일본 게임들이 세대교체를 통해 미국에서 어떻게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