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진코믹스 미국 웹툰팀 이은정 팀장. 사진= 이코노막리뷰 박재성 기자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우리나라 콘텐츠가 전 세계에 팬덤을 가지고 있는 마블코믹스의 <어벤져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등 인기 슈퍼히어로 만화들과 경쟁해 이겼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마블의 본고장 미국에서.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온라인 웹툰 플랫폼 업체 레진코믹스의 미국 서비스 앱은 지난 1분기(1~3월) 미국 구글플레이(유료 앱 결제 기준) 만화 부문 최고매출 1위를 기록했다. 같은 범주에서 <어벤져스>의 마블코믹스 앱은 2위, <배트맨> 시리즈의 DC 코믹스 앱은 3위, 그리고 <원피스>로 잘 알려진 일본 소년점프 코믹스 앱은 5위에 올랐다. 이는 ‘만화나 영화 콘텐츠로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편견을 완벽하게 깨부순 한국 콘텐츠 업계의 쾌거였다.

이러한 성과에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미국 독자들이 보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 웹툰을 ‘만들어낸’ 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세계 최대 콘텐츠 전장(戰場) 미국에서 한국 웹툰을 정상의 자리에 올린 최전선에 있는 레진코믹스 미국 웹툰 팀 이은정 팀장(28)을 지난 5월 29일 서울 신사동 레진코믹스 본사에서 만나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마블’과 ‘점프’를 이긴 것의 의미

만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국 내에서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 만화의 인지도나 일본의 만화 주간지 <소년점프>가 전 세계 콘텐츠 업계에서 차지하는 입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블이나 DC는 그 역사가 100년이 넘은 미국 콘텐츠 업계의 상징이다. 이 회사의 만화들을 원작으로 해 생산된 2차 저작물의 경제 가치는 ‘조’ 단위에 이른다. 일본에서 <소년점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레진코믹스의 성과는 더 값지다. 다른 예로 비유하면, 한국 농구선수들이 미국에서 열린 농구 경기에서 미국 농구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과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은정 팀장은 “한국 작가들의 웹툰은 모바일이나 웹 화면의 구성을 이용해 스토리의 긴장감을 잘 유지하는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면서 “미국의 독자들이 여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사진= 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만화 회사에서 일하게 된 ‘만화광’

이은정 팀장은 레진코믹스에서 일하기 전 영어를 기반으로 한 어학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덕후’라고 불릴 정도로 만화광이었다. 마침 이직을 준비하던 이 팀장은 레진코믹스의 한영번역 프리랜서 채용 공고를 보고 즉시 지원했고, 번역 프리랜서로 일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어 기뻤고 일을 즐기다 보니 정직원으로 일하고 싶어져 회사에 뜻을 전했다”면서 “마침 레진코믹스에서도 해외사업을 위한 번역 담당자를 찾고 있었고 기회가 잘 맞아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썸 타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레진코믹스를 통해 미국으로 서비스되는 웹툰은 작품 발굴 → 영문(英文)화 설정집 작성 → 전문 번역 팀 구성 후 작품 번역 → 번역 검수 → 온라인 연재 등 총 4가지 과정을 거쳐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만화를 영어로 번역하는 단순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소하게는 만화 주인공의 이름이나 고유명사나 대사 한 문장에 담긴 언어·문화적 배경, 작가가 의도한 복선(伏線)의 유무, 작품의 관람 등급, 작품의 의도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영어 표현 등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게는 수백 가지 이상이다.

▲ 레진코믹스 영문 서비스. 출처= 레진코믹스

이 팀장은 “남녀 간 사랑을 주제로 하는 우리나라의 로맨스 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썸 타다’라는 말은 ‘남녀가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 직전에 서로에게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의 의미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똑같이 전달할 수 있는 영어 표현은 없다”면서 “가장 비슷하게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표현들을 찾아본 후 전후 맥락에 맞게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은정 팀장은 “‘썸 타다’라는 표현으로 예를 들면, 가장 많이 쓰는 영어 표현은 ‘Hung out’ 정도가 있는데 이는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쓰이는 표현이며 그 외로 두 남녀가 ‘무엇’까지(?) 같이 했는가에 따라 ‘Hooked up’, ‘Fooled around’ 등 다양한 표현으로 번역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은정 팀장과 웹툰 번역 팀이 영어 번역에 가장 애를 먹은 작품은 레진코믹스의 만화 <신기록>이다. 그녀는 “<신기록>은 우리나라의 토속 신앙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공포 만화다. 이 작품에는 내용의 특성상 산신, 도깨비, 잡귀, 역귀 등 우리나라 전통 신앙과 문화 특성이 반영된 영적 존재들의 고유명사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면서 “이 고유명사들의 정확한 의미를 번역으로 전달하기 위해 작가의 조언을 여러 번 구하는가 하면,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이와 유사한 의미의 영어 표현 수백 가지를 찾았고, 이렇게 긴 작업 때문에 <신기록>은 한 편 연재 분량을 번역하는 데 연일 야근을 하는 일도 많았다”고 처음 작품을 번역할 당시를 회상했다.

레진코믹스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언어 전환뿐만이 아니다. 아직 연재가 완료되지 않은 만화의 내용 전개도 고려해야 한다. 이 팀장은 “레진코믹스가 미국에서 연재하는 만화들은 아직 작품이 완결되지 않은 작품이 대부분”이라면서 “작가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만화를 번역하면 자칫 이후에 전개될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작품의 결말을 미리 알게 하는 것)’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잘 파악하는 작업도 번역만큼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1차 번역이 끝나면 번역 총괄 에디터가 전체 내용을 꼼꼼하게 다시 한 번 점검한다. 여기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어색한 번역을 발견하면 위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이렇게 레진코믹스의 우리 웹툰은 미국의 독자들이 읽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언어로 다시 태어난 작품이 된다.

▲ 레진코믹스 만화 <신기록>의 영어 번역판 . 출처= 레진코믹스

‘웹툰’은 성장 중

레진코믹스 웹툰의 미국 시장 성공은 단순히 ‘서비스의 반응이 좋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점점 변화하고 있는 흐름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 팀장은 “코믹스(종이 만화책)를 한 장씩 옆으로 넘겨 가며 만화를 읽는 미국의 독자들에게 화면을 위로 올려가며 읽는 방식의 웹툰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가고 있다”면서 “모든 콘텐츠의 모바일이나 디지털 최적화가 이뤄지고 있는 지금, 한국의 웹툰은 이러한 변화에 가장 적합한 콘텐츠가 될 것이며 레진코믹스는 한국 웹툰 글로벌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고 말했다.

목표는 ‘글로벌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가 지향하는 목표는 하나다. 전 세계 만화 작가들이 레진코믹스를 통해 해외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은정 팀장은 “지금은 우리 웹툰 그리고 레진코믹스 서비스를 해외 시장에 알리는 일이 우선 과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몰입하고 있지만, 이후에는 해외 유명 작가들이 ‘레진코믹스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하며 앞다퉈 좋은 작품들을 가져와 공유할 수 있는 글로벌 만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목표”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이 팀장은 “회사가 가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첫 단추를 잘 꿰는 데 우리가 조금이나마 일조한 것 같아 요즘은 기분이 매우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