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 서기실의 암호> 태영호 지음, 기파랑 펴냄.

북한 출신 인사가 이런 말을 들려줬다. “남북한 교류에서 가장 이해 못할 장면은 양측 인사들이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할 때예요. 그 노래의 가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데, 북측 사람들은 당연히 적화통일을 연상하며 부릅니다. 평생 그렇게 세뇌당해왔으니까요. 그런데, 남한 인사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우리는 역시 하나다’라며 감동하더군요.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로 망명한 태영호의 책도 우리가 몰랐던 북한을 밝힌다. 그렇다고 하여 기존 탈북자 서적처럼 북한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북한의 실체를 신랄하게 파헤친다. 북한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발행 시점에서 더욱 빛난다. 우리는 지금 북한체제를, 북한 주민과 김씨 일가를 더 이상 몰라선 안 되는 급박한 처지가 됐다. 듣기 불편하다고 북한의 진실을 외면하다간 미국 중국 등 남의 손에 운명을 내맡기는 처지로 전락할지도 모를 상황이다.

핵 문제부터 보자. 얼마 전 남북정상은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했다. 사실 이 단어는 남북한 간 의미가 판이하다. 태영호에 의하면, 남한에서는 ‘한반도에 핵무기가 없는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뜻하는 전략적 개념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외치자 흔쾌히 남한 내 비핵화를 이행했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은 체제유지를 위해 핵개발을 지속하면서 “한반도에 언제든 핵을 끌고 들어올 수 있는” 주한미군은 철수시키라고 요구한다.

지도자로서의 정통성과 명분이 부족한 김정은은 핵과 ICBM, 공포정치를 택했다. 그는 2016년 12월 망명 직후 북한의 ‘핵 질주 계획’을 밝혔다. 당시 2017년의 핵실험과 ICBM 발사를 예상했고, 2018년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평화적 환경을 조성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북한은 평창올림픽을 전후해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북한은 판문점 선언에 철도 건설을 담았다. 태영호의 증언에 의하면 철도 건설은 공허한 선언이다. 2000년대 초 푸틴과 김정일은 한반도-러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에 합의했다. 그러나 동해안 철도를 따라 배치돼 있는 각종 비행장들과 방어부대 때문에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은 불가능했다. 부대를 옮기고 동해안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데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이 없었다. 그런데도 북한은 지금도 마치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이 가능한 것처럼 한국과 러시아를 유인하고 있다.

태영호가 김정일의 지시로 에릭 클랩튼의 평양공연을 위해 집요하게 초청했을 때 에릭 클랩튼은 ‘북한의 인권상황’을 지적하며 끝내 거부했다. 평양공연 때 김정은이 손을 내밀자 감격하여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90도로 인사한 한국의 연예인들과 대조를 이룬다.

전시 상황에서는 터널 전술이 여러모로 유효하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적 수준이나 에너지 사정으로는 터널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정전이 되면 환풍기가 돌아가지 않아 통신장비 등 주요 시설에 녹이 슬고 병사들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린다. 준전시 상태가 선포되거나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벌어지면 인민군 대부분이 터널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부담과 고통이 대단히 크다.

김정은 집무실이 있는 조선노동당 본관은 3층 규모 청사다. 이곳에 있는 ‘3층 서기실’은 중앙당 일꾼들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완전 금지구역으로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고 세습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통해 군사독재를 넘어 노예사회와 같은 체계를 수립했다. 북한 주민들은 인간의 기본 권리인 의사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 생산수단을 보유할 자유, 자기 자녀를 관할할 수 있는 자유마저 빼앗겼다. 북한은 김정은 가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노예제 국가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은 북한 주민을 노예사회에서 해방시키는 ‘노예해방 혁명’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체제와 이념을 하나로 통일하며 민족 문화와 동질성을 융합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태영호는 북한 내부변화에 대해 기대감을 보인다. 그는 통일의 주체를 ‘북한 주민’으로 규정한다. “북한 주민은 자체로 일어날 힘과 의식이 있고 이미 엄청난 정보가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북한 내부의 변화는 이미 진행형이다. 그 변화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속도로 올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이 책의 행간에는 북한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서며 밖에서 이를 지원하는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이뤄져 마침내 해방의 날이 오길 바라는 태영호의 목숨 건 호소가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