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재필 산업 2부장] ‘제 식구 감싸기.’

기사 제목에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표현이다. 같은 집단의 구성원이 잘못을 저질러도 같은 집단 소속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봐주는 행태를 비꼰 표현이다. 최근 홍문종·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부결되자,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받은 국회가 대표적 사례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말은 ‘같은’ 조직이나 집단의 사례에서 주로 나온다.

그런데 최근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의 혈액백 입찰 의혹을 취재하면서 ‘다른’ 조직을 ‘감싸기’ 하는 적십자사의 다소 특이한 행태를 봤다. 이번 입찰의 주관사는 적십자사, 입찰 참여 회사는 녹십자MS(이하 녹십자)였다. 통상 입찰 주관사와 입찰자의 관계를 ‘갑을 관계’로 본다면 적십자사는 ‘갑’, 녹십자는 ‘을’이다. 그러나 취재를 하면 할수록 ‘갑을 관계’는 뒤바뀐 듯했다. 적십자사가 녹십자의 대변인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 강주성 대표는 “녹십자가 적십자사의 ‘영원한 갑’이다”고 지적했다. 강 대표도 혈액백 입찰에 대해 의혹을 갖고 적십자사 등에 대해 취재를 하는 중이었다.

강 대표는 왜 녹십자가 적십자사의 ‘갑’이라고 강조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적십자사가 언론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내놓기는커녕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녹십자 입장에서 해명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녹십자 혈액백 입찰 의혹은 간단하게 해소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녹십자의 혈액백이 기준을 어기고 포도당 과량 문제를 갖고 있다는 지적인데, 이에 대해 공인 기관에 공개적으로 검사를 의뢰하고 이를 투명하게 밝히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적십자사는 의혹을 해소하기보다는 녹십자가 제출한 서류를 근거로 녹십자 편을 들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녹십자의 혈액백은 미국 약전(USP)에 의해 정해진 포도당 투입량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다수의 정황이 나왔다. 미국 약전은 최초 투입 포도당 양은 31.9g/ℓ로 규정하지만 녹십자 혈액백의 최초 투입 포도당 양은 이보다 많았다. 그런데 적십자사는 미국 약전이 규정한 환원당 함량을 ‘순수 포도당’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 평가했다. 적십자사는 자의적 해석에 대한 근거도 내놓지 못했다. 결과값을 묻는 데 기준값으로 답변하고, 기준값으로 묻는 데 결과값으로 답변하는 등 오락가락, 동문서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 의심스러운 점은 녹십자 혈액백이 ‘부적격’ 제품이라는 의혹 보도 이후 적십자사의 해명자료다. 적십자사는 기자에게 보낸 해명자료에서 “제조공정 중 손실에 따른 과량투입은 단위공정별 손실 원인을 분석하는 등의 과학적 근거로서 인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과량투입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면서 녹십자의 제품표준서를 근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

식약처는 미국 약전을 따르지 않고 제조된 혈액백은 “불량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적십자사는 과량투입됐지만 ‘부적격’ 제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제조업체인 녹십자의 소명을 적십자사가 대신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의료계에선 탈락업체의 제품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번 입찰에서 탈락한 업체는 현재 세계 100여개 나라에 혈액백을 공급하는 글로벌 의료제품 제조회사인 탓이다. 한 의료계 종사자는 “우리나라 식약처에서도 허가를 받았고, 전 세계에 공급되는 제품이 유독 적십자사의 검사에서만 부적합한 제품이라고 판정을 받는 게 가능하느냐”고 반문했다.

학계와 의료계, 시민단체가 나서 녹십자의 혈액백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데도 적십자사는 귀를 막고 있다. 해명은 전문가들도 납득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오히려 “과량투입했다”며 제 발등을 찍는 실수도 했다. 강주성 대표는 “해명이 거짓이니 실수가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당사자가 아무리 거짓 해명으로 도망가려고 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진실의 힘’을 이길 순 없다. 거짓이 더 교묘해지면 ‘진실’은 더욱 더 정확해진다. 녹십자는 지난 30년간 적십자사에 혈액백을 사실상 독점 공급해왔다. 적십자사가 "녹십자는 ‘제 식구’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할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 정정보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