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기업 홍보팀이나 직원들을 만날 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당연히 기업의 비전과 경영진의 통찰력을 자랑하기 일쑤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반 정도는 걸러서 듣는 편이다. 그들이 취재원일 때는 듣고 싶은 멘트만 받아내면 끝이다. 그러나 취재원이 아니라 절친한 인간으로서 그를 대할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럴 때 더욱 내밀한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LG 홍보팀이나 직원들과 만날 때는 항상 기분이 묘했다. 이들은 취재원일 때도, 친한 지인이 됐을 때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인화 경영을 말하며 “겉으로 보는 것과 안에서 느끼는 것은 다르겠지요”라고 말하면, 이들은 피식 웃으며 “똑같아요”라고 웃었다.

그 가운데서 일부는 “직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며 어설프게 패러디도 했다. 사람 사는 곳이 항상 좋기만 할까. 그럼에도 이들이 든 소주잔에 덩그라니 맺히는 진심을 볼 때면, ‘혹시’라는 생각도 잠깐 가졌다. 그 근원을 따라가면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걷혀 하늘이 쾌청한 늦은 봄날의 일이다. 고인은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어떤 회한을 남겼을까. 감히 짐작하건데 반도체가 아니었을까.

정도경영을 표방하며 인화의 가치를 설파한 독립군 기업의 3세 경영자는, 가는 순간까지 재벌들의 통과의례인 그 흔한 구설에도 한 번 오르지 않았다. 의인을 만나면 반드시 돕고, 유난히 새를 좋아한 그는 살아 생전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을 남기기도 했다.

그에게 1990년대 말 외환위기는 쓰라린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1989년 5월 금성일렉트론을 설립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고인은 1995년 사명을 LG반도체로 바꾸고 이듬해 상장까지 이뤄냈다. 그러나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직후 ‘재벌 빅딜’에 나서면서 LG반도체는 현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20년간 일군 반도체 사업을 통째로 넘길 때 고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최근 만난 당시 임직원은 고인의 피눈물을 봤다고 회상했다. 진짜 피눈물은 아니었겠지만, 고인이 한동안 두문분출하며 힘들어 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LG반도체는 현대로 넘어간 후에도 한동안 어려움을 겪다가 SK하이닉스로 재탄생,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결과는 긍정적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백색가전의 맹주인 LG전자와의 시너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기업 등 많은 경제주체들의 미래를 바꾼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 시간에도 규제 일변도의 정부가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반도체가 천추의 한으로 남았을 고인은, 그래도 23년간의 경영을 통해 거인으로 우리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0년대 초반 국내에서 볼모지나 다름없는 이차전지 사업에 뛰어들어 지금의 LG화학 전성기를 끌어냈으며 디스플레이 명가인 LG디스플레이를 유산으로 남겼다. LTE 전국망 정국에서 두각을 보인 LG유플러스의 성장에도 고인의 집념이 서렸고, 백색가전의 맹주인 LG전자는 고인의 자식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 고인이 남긴 최고업적은 ‘우리에게도 존경할 만한 기업인이 있었다’는 기억의 공유다. 비단 인화의 경영가치를 설명하지 않아도, 고인은 비정한 기업경영의 현장에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다.

주말에는 인천으로 나들이를 가면서 꼭 마곡 LG 사이언스 파크를 돌아볼 생각을 굳힌다. 고인이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에게 ‘미래의 실험장’이라며 반드시 완성해달라는 마지막 유지를 남긴 장소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한 시대를 풍미한 경영인의 흔적을 두 눈에 담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리라. 거인의 그림자는 깊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