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대만의 드라마는 한때 아시아를 대표했다. <판관 포청천>과 <꽃보다 남자> 등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콘텐츠 강국 대만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었으며, 각국에서 다수의 리메이크 제작을 끌어내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대만의 영상제작 시스템은 파탄 났으며 주요 방송사의 시청률은 바닥에서 기어가고 있다. 대만의 안방극장은 외산 드라마가 채우고 있으며, 최근까지 프라임 시청시간인 오후 9시에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그나마 시청률이 나온다는 이유에서다.

대만의 영상사업이 파탄 난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후반 100개에 달하는 케이블 방송사를 무차별 허용하며 치킨게임이 벌어졌고, 그 틈을 노려 중국의 자본력이 침투해 대만의 영상사업 시스템 노하우를 통째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대만 영상제작 인재들이 중국으로 넘어갔으며 대만 콘텐츠 사업은 자생력을 상실했다.

대만 정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국 영상사업에 직접 투자를 단행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2017년 종영된 한국 tvN 드라마 <도깨비>가 대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차이잉원 총통이 직접 나서 자국 영상사업에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대만 영상사업의 붕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의 거대한 자본력에 국내 드라마 제작사의 지분이 넘어가는 일이 잦아지는 등, 대만의 전철을 밟아가는 추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단 콘텐츠 산업 외 다양한 영역에서도 대만 영상사업 몰락사를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홈그라운드 전쟁론 측면에서 의미 있는 관전 포인트가 있다.

대만 영상사업 몰락의 전조는 무분별한 방송사 설립에 따른 치킨게임에서 비롯됐으나, 결정타는 중국 자본의 잠식이다. 처음 중국은 대만의 영상사업 제작 시스템을 지원한다는 개념으로 손을 내밀었으며, 치킨게임에 지친 대만 인재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중국 자본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자본력을 통해 대만의 노하우를 흡수한 후 순식간에 ‘갑’이 됐기 때문이다.

당장 어려움에 빠진 대만 영상사업의 주역들을 끌어들여 마음껏 노하우를 익힌 후 자기들의 능력을 끌어올리자 토사구팽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결국 대만 영상사업은 중국 영상사업의 하청기지로 전락했으며, 중국 영상사업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 아닌가? 현재 국내에는 글로벌 ICT 기업들이 우리의 스타트업을 육성한다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구글 서울 캠퍼스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내 스타트업 발전에 도움을 주는 한편,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그 자체로 고무적이지만 다음은 어떻게 될까? 구글 서울 캠퍼스에서 양성된 국내 스타트업들이 기꺼이 거대한 구글 생태계의 양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나간 해석일까?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이 국내에서 벌이는 중소기업 양성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모두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자본을 투입해 국내 중소기업과 상생을 꾀한다는 취지지만, 결국 자체 생태계 강화가 목표다.

대만 영상사업과의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다. 아시아를 호령했던 대만이 갑에서 을로 전락한 반면, 우리의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아직 을의 처지에서 갑의 지위를 노리고 있으며 이를 글로벌 ICT 기업들이 돕고 있기 때문이다. 또 스타트업들에게 국내의 척박하고 작은 내수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게 도와주는 글로벌 ICT 기업들의 도움을 마냥 색안경 끼고 볼 수도 없다.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우수한 국내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ICT 기업과 협력하는 것은 독려해야 하지만, 우리의 시선으로 세계를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큰 문제다. 글로벌 ICT 기업의 도움과 자생적인 노력이 균형을 이뤄야지만 최악의 경우 플랜B가 만들어질 수 있다. 플랜B가 있어야 토사구팽을 당하더라도, 더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