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 대한 향수가 있다. 어릴 적 시골의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딱지 치고 자치기 놀이를 하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아직도 시골에는 그 길이 있지만 지금 그곳에는 이런 놀이를 할 친구도 아이들도 없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골목길 하면 가슴 한편으로 먹먹한 뭔가가 항상 꿈틀댄다. 익선동 골목길에서 이런 느낌을 찾아 작년 한 해 동안 헤맸지만 찾질 못했다. 상업화의 속도 앞에 옛 정취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찾은 청파동 골목길은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비록 청파동이 서울역 뒷동네로 역촌 마을의 성격이 강했고, 낡은 연립주택들이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있고, 공장 같지 않은 봉제공장들이 곳곳에 있긴 하지만 그 옛날 정취는 그대로인 것 같아 고향에 온 듯 포근했다. 다만 도시화된 아파트의 삶에 비해,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의 질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듯해 안쓰럽게 느껴졌다. 언덕 위에 있는 동네의 지리적 특성과 동네가 형성된 배경에 연유한 듯하다.

청파(靑坡), 푸른 언덕이라는 동네 이름이 참으로 예쁘다.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그 옛날에는 푸른 언덕이 많았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며 이미 마음 속에는 푸른 언덕이 들어왔다. 붉은색의 국립극단과 하얀색의 골목길 계단을 지나 언덕 위에 올라서면 한눈에 서울이 보인다. 서울역 너머로 펼쳐진 도심 빌딩의 다양한 색깔, 남산의 초록과 파란 하늘, 그리고 청파동 일대의 알록달록 주택들 속살들이 보인다. 간혹 빈 집들이 있고 또 어떤 집의 지붕은 무너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네 어르신 한 분은 빨리 재개발이 되면 좋겠다고 한다. 서울역이 가까워 출퇴근이 쉬운 곳이라 젊은이들이 모여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되면 원주민들은 그 보상으로 삶의 질이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도시재생이란 말이 좋긴 한데 실제 현실적인 생활 상황은 재생으로는 힘들다는 뜻으로 읽힌다. 무조건적인 재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과 도시재생의 한계가 충돌하는 지점이라 생각된다. 

푸른 언덕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구자룡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파동은 아직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국립극단의 건물은 모두 붉은색은 칠해져 있다. 한편으로는 강력하고 한편으로는 ‘왜?’라는 의문이 든다. 이곳은 원래 국군기무사령부 수송대가 있었던 곳으로 차고, 정비고, 막사 등의 건물이 부대 이전 이후 방치되어 있었다. 이를 극장, 연습실, 사무실로 리모델링했다. 이제는 도시재생의 멋진 문화 명소가 되었다. 군부대의 칙칙함을 연극의 열정으로 바꾸기 위해 열정적인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연습실에서는 젊은 연극인들의 연습 열기로 가득했다.

국립극단 옆으로 나 있는 다래길로 들어서면 서울의 옛날 동네를 만나게 된다. 다래 5길은 푸른 언덕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이다. 길을 따라 이어진 주택의 담장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다. 언뜻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이 생각났다. 모 광고에 등장한 흰색과 푸른색의 강력함을 이곳에서도 느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는 도시브랜드 슬로건으로 ‘컬러풀 대구’를 주장하고 있는데 14년이 지났지만 대구가 컬러풀한지 모르겠다. 모든 브랜딩은 주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실행을 통해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청파, 푸른 언덕 역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비록 지금 이 지역에 푸른 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수 있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꼭 푸를 필요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지역을 디자인해 본다면, 혹은 브랜딩해 본다면 푸른 언덕에 딱 맞게 푸른색을 주 색깔로, 흰색을 보조 색깔로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면 5년 후에는 멋진 푸른 언덕이 되지 않을까? 브랜딩은 진정성을 가진 지속의 힘이 만들어낸다.

푸른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길(다래 5길) ⓒ 구자룡

여기에 더해 언덕길 끝을 돌아 다솔 3길 옆의 좁은 길을 올라가면 ‘청파로 73길 73-10번지’ 앞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애처롭게 서 있다. 동네 어르신의 소개로 알게 된 은행나무는 족히 백 년은 된 것 같은데 설명이 없어서 연유를 알 수가 없다. 다시 도시 디자이너나 브랜드 매니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곳 주변에 있는 집들을 서울시나 용산구에서 사들여 은행나무 주변을 정비하고 넓은 쉼터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동네 주민들이 그 옛날 뛰어놀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단장을 한다면 이 또한 도시를 살리는 길이 아닐까.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쉼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평상에 앉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래 5길을 통해 푸른 언덕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여기서 잠시 쉬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 도심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멋진 장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야경은 너무 멋질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 서울시가 주도한 ‘시민 누리 공간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은행나무 쉼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나서서 기존 공간 내에서 의자 몇 개와 평상이 있는 작은 쉼터로 바꾸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그나마 골목길에 벽화를 그리거나 페인트로 색깔을 입히는 작업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슬럼화된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까. 현실의 벽은 높다. 그 벽을 넘어 더 큰 가치를 만들어야 새로움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푸른 언덕을 넘어 만리재 방향으로 돌아가면 만리시장이 있다. 만리시장 건물은 원래 영화 세트장이라고 한다. 50~60년대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영화를 찍던 역사적인 장소지만 지금은 시장으로 기능이 바뀌어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만리시장을 지나 오르막길이 끝나는 곳에 ‘성우이용원’이 있다. 세월을 머금은 듯, 세월을 비켜간 듯 1927년부터 3대째 운영되고 있는 이발소다. 한눈에 봐도 많이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도 되어 있다.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최근에 산 도구가 족히 10년은 된다 하니 여기 모든 물건들이 골동품에 가깝다. 이남열 이발 명인의 솜씨를 느껴보고자 머리를 맡겼다. 가위질이 날렵하다. 가위질 소리가 예술이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기술이다. 30년을 갈고닦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도구를 갈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게 한 10년 걸린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배우려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단다. 배울 수 없는 기술이 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현실 앞에서 역사의 궤적을 더듬어본다. 변하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고, 또 변해야만 좋은 점도 있다. 우리 모두 이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이런 현실이 바로 이 골목길의 매력이다.

한 장소에서 그 모습 그대로 3대를 이어 영업 중인 성우이용원 ⓒ 구자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