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허지은 기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기준금리 결정에 물가보다 실물 지표를 더 중요하게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소비자물가가 예상대로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물가보다는 불확실성이 높은 소비, 투자, 고용 등의 실물 지표와 경기 회복세가 기준금리 결정에 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4일(이하 현지시간) 제21차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한 이 총재는 기자들과 만나 “우리 경제가 예상대로 3% 성장세를 유지하고 물가도 2% 대에 수렴하게 된다면 (기준금리를) 올릴 수 있을 때는 올려야 한다”면서 “모든 가능한 데이터를 종합해서 여러 3박자가 맞아 떨어질 때는 완화 정도를 줄여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 제21차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4일 저녁 마닐라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주요 현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이 총재는 “가장 예의주시하는 데이터는 실물 데이터다. 어떤 금통위원은 계속 물가 강조하는 분도 있는데 그건 보는 시각, 역점을 두는 곳이 다른 것”이라며 물가보다는 실물 지표에 더 큰 주안점을 둔다고 말했다. 그는 “소비, 투자, 관광객, 고용 등 지표를 먼저 본다. 관광객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인 관광객을 포함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고 설명했다.

4월 소비자물가가 1.6%를 달성해 ‘서프라이즈’를 보였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서프라이즈라는 생각은 아니다. 감자 값이 많이 오르면서 약간 이례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물가 전망이 바뀐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통화정책에 있어서는 6개월 또는 1년 후의 물가가 중요하다”면서 “최근 물가가 1% 초중반 수준이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중앙은행 제1목표 ‘물가안정’…”오르지 않는 물가는 모두가 겪는 공통 과제”

일반적으로 기준금리 결정에 있어 가장 큰 고려 요소는 물가다.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이 제1 목표로 삼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법 제1조에 나온 한은 설립 목적에도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해 물가안정을 도모한다’고 나와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역시 물가 흐름을 면밀히 파악해 기준금리 조정에 반영하고 있다.

통상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시중금리도 같이 올라 투자와 소비가 위축되고 물가가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물가가 특정 수준이나 목표치만큼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금리를 올리기는 쉽지 않다. 물가와 경기가 함께 침잠하는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준과 한은이 중장기 목표로 제시하는 물가상승률은 2%다. 현재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1%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다.

이 총재는 물가가 지금은 낮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최근 오름폭을 확대하고 있는 유가에 대해서는 “수요도 늘고 감산 연장 가능성과 일부 지정학적 리스크가 맞물리면서 유가가 올랐다”고 진단했다. 다만 “우리 경제에 성장과 물가를 큰 폭으로 수정해야 할 만큼 그렇게 더 오르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외식비가 급등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 총재는 “수요측 압력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 부담을 가격에 반영하려면 수요가 뒷받침해 줘야 한다”면서 “수요측 압력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 비용쪽 압력을 업주가 부담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어느 나라나 같이 겪고 있는 고민이다. 중앙은행의 고민이기도 하다”면서 “분명 경기가 괜찮은데도 물가가 오르지 않으니 금리를 조정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 제21차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4일 저녁 마닐라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주요 현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물가 상승 자신감 보인 , 물가보다 실물 지표 불확실성 커진

지난 2일 열린 5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미국은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금리는 동결됐지만 물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성명서에 물가와 관련해 3월 “12개월 기준 전반적인 물가와 음식과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는 지속적으로 2%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2%에 근접하게 움직였다”고 수정하면서 연준의 물가상승 자신감을 드러냈다.

특히 성명서에 “물가 압력이 중기적으로 대칭적인(Symmetric)’ 물가 목표에 근접할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단기적으로 물가가 2%를 상회하더라도 중기적으로 물가상승세를 살펴보겠다는 여지를 남겼다. 시장에서는 이번 FOMC에서 점진적인 금리인상 기조가 지속될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오는 6월과 9월 추가적인 금리 인상이 단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은 물가와 함께 소비, 투자 등 경기 지표도 회복세를 계속하고 있다. 성명서에서 연준 위원들은 지난 3월 “최근 경제 지표는 가계소비와 기업 고정투자 증가세가 지난해 4분기 대비 완화됐다”라는 표현을 “최근 경제 지표는 가계소비 성장이 지난해 4분기 대비 완화됐고 기업 고정투자는 강한 증가세를 유지했다”고 수정했다. 그만큼 3월 FOMC 대비 경기와 물가 상황에 대해 긍정 평가를 내린 셈이다.

한국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한은 금통위에 따르면 식료품과 석유류 등을 제외한 근원인플레이션율은 지난해 상반기 1.6%, 하반기 1.5%에 이어 올 1분기 1.3%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4월 소비자물가가 1.6%로 깜짝 상승하긴 했고, 하반기 2% 목표치에 근접한다고 해도 이 총재의 말처럼 실물 경기 지표가 뒷받침될 지는 미지수다.

이 총재 역시 이날 “만약 우리 경제가 지금과 같은 추세를 유지하고 이걸 그대로 끌고 가면 금융불균형이 커진다”면서 “금융불균형이 당장은 문제가 안 되겠지만 1~2년 정도 쌓일 경우 한계점이 왔을 때 폭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불균형이 당장 터질 가능성은 없지만 조금 더 커지면 위험할 수 있다. 그런 걸 감안하면 기준금리를 올릴 수 있을 때는 올려야 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