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 스필버그의 새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묘사된 미래는 생각보다 더 가까이 와 있다. 주인공이 촉각 기술을 사용해 가상의 물체를 느끼고 조종하고 있다.       출처= 워너 브라더스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HTC社(HTC Corp.)의 바이브(Vive) 헤드셋을 쓰고 체험한 것은 만화 같은 가상현실 농장에서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갑자기 작은 여우가 헛간 뒤에서 나타나 손으로 뛰어 올랐다. 진짜 같은 동물의 모습에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손바닥 위에서 빙빙 도는 작은 여우의 발 촉감이었다.

이 체험을 위해서는 헤드셋 외에도 6년 된 스타트업 <햅트엑스>(HaptX Inc.)가 개발한 커다란 검은 장갑을 착용해야 했다. 두꺼운 와이어가 손가락 위에 아치처럼 걸려 있고 장갑의 그물망에 내장된 100개가 넘는 공기 주머니 속으로 공기 흐름을 조절해 피부에 촉감과 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몇 초 후, 가상 여우가 손에서 뛰쳐나오면서 촉감은 사라졌다. 여우의 털을 쓰다듬자 부드럽게 물줄기가 손끝에 닿는 것을 느꼈다.

촉각 기술은 힘, 진동 및 동작 등을 사용해 가상 물체의 느낌을 시뮬레이션한다. 사실 스마트폰, 피트니스용 손목 밴드, 비디오게임 컨트롤러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고동치는 느낌(Pulsing Feedback)의 기본 버전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가상현실에 촉감을 느끼는 것은 최근까지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등장하던 얘기였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에서는 가상현실에서 촉각을 경험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 영화는 지구를 황폐화시킨 기후 변화로 인해 야기된 에너지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등장 인물들은 종말 직전의 화려한 사이버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가상현실 모자(Visors)와 촉각 장갑(Haptic Glove)을 착용하고 먹고 마시는 것 외에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이 무대지만, 비록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는 덜 발달된 몇 가지 햅틱 장비(Haptic Gear)는 이미 시장에 나와 있다.

▲ 출처= augmenta.it

전문가들은 현재 개발 중인 몇 가지 기기들이 의료 분야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에 영향을 미쳐 이러한 헤드셋의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촉감의 고고학: 전기에서 컴퓨터까지 촉각으로 교류하기>(Archaeologies of Touch: Interfacing With Haptics from Electricity to Computing)의 저자이자 찰스턴 대학 신(新)미디어학과 부교수인 데이비드 패리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촉감은 그동안 VR에 없었던 차원을 채워줌으로써 사용자와 가상 세계 사이를 진짜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VR은 기껏해야 인상적인 광경이나 소리만 제공하는 데 불과했지요.”

하드라이트 VR社(Hardlight VR Inc.)도 2017년 10월에, 30가지 이상의 가상현실 비디오 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슴과 팔에 감각을 전달하는 모터가 달린 촉각 재킷(Haptic Jacket)을 300달러에 출시했다. 재킷을 켜면 게이머는 적의 가상 검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 등을 관통하고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드라이트의 설립자인 모건 싱코는 이렇게 말한다.

“화면에 그냥 ‘당신이 당했어’라는 팝업창만 띄우는 것보다는 훨씬 더 직관적이지요. 당신이 실제로 당했다는 것을 ‘직접 느낌’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촉각 장갑을 만든 ‘햅트엑스’는 자신의 가상현실 아바타가 자신의 움직임을 그대로 시뮬레이션하게 할 수 있는 전신 햅틱 수트도 개발하고 있다. 이 수트를 착용하면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용자들이 동일한 가상공간을 점유해 마치 같은 회의실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고 ‘햅트엑스’의 공동 설립자인 제이크 루빈은 말한다. 이 회사는 전(前) 트위터 CEO 딕 코스톨로, 월트 디즈니의 존 스노디 부사장 등을 비롯한 투자자들로부터 1000만달러(107억원) 이상의 자금을 모았다. 전신 수트는 아직 초기 프로토타입 단계이지만, 햅틱 장갑의 업데이트 버전은 올해 말에 약 20개 기업과 정부 고객에게 배송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존에서 보안 엔지니어로 일했고 현재는 개인정보 보호, 익명성 및 섹스 테크를 주로 연구하는 사라 제이미 루이스는, 처음에는 섹스 관련 햅틱 장비가 가장 많이 선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섹스 산업은 모든 기술의 발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술 채택을 선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상섹스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고, 햅틱 기술을 사용한 섹스 행위용 새 프로그램들이 곧 개발될 것입니다. 실제로 해부학적 구조의 성기 모형물(Anatomical Sleeves), 여성용 자위 보조기구, 포옹감을 느끼게 해주는 담요 등과 같은 기기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 출처= Hardlight VR Inc

햅틱 기기에 온도 제어 장치까지 추가해 사용자가 가상 사물로부터 온기와 추위를 느낄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고 있는 회사도 있다. 한국의 스타트업 ‘테그웨이’(TEGway)는 섭씨 5도에서 43도까지 부드럽게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열전 모듈(Thermoelectric Module)을 개발하고 최근 플로리다의 햅틱 장갑 제조업체와 제휴 계약을 체결했다. ‘부즈 앨런 해밀턴’(Booz Allen Hamilton Corp.)의 이머시브 컴퓨팅(Immersive Computing, 컴퓨터 시스템이나 영상이 사용자를 에워싸는 듯한 기술) 사업부 부사장 문짓 싱은 이 기술이 실제적이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회사의 고객 중에는 신병에게 햅틱 기어를 착용시키고 훈련을 시도하고 싶어 하는 미 육군 부대도 있다.

“가상의 시뮬레이션에서 군사 훈련에 처음 참가했다가 다친 신병이 자신의 피의 끈적끈적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다중 센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병이 훈련 현장에서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촉각이 가능한 가상 공간에서 사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벤처 캐피탈 회사 ‘루프 벤처스’(Loup Ventures)의 진 먼스터 애널리스트는 이 영화 같은 시대가 되려면 가상현실 헤드셋이 스마트폰처럼 널리 보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들은 2017년 한 해 동안 약 400만개의 헤드셋을 구입했다. 먼스터는 올해 헤드셋의 판매는 지난해보다 3배 이상 늘어나고 2023년에는 1억대를 돌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시점을 넘기면, 햅틱 같은 주변기기 시장이 크게 도약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상 과학 영화가 현실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