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고단한 시절, 아버지가 큰 마음먹고 구입한 흑백 TV가 환한 불빛을 터트리면 안방에서 대청마루로 이어지는 좁은 자리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 모두는 영웅의 박치기에 환호하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우주선의 운명에 숨 죽였으며, 가슴을 울리는 신파에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흘러 TV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적어지기 시작했다.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이런저런 기술들이 탄생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TV의 존재감은 조금씩 흐려졌다. 최근에는 모바일 방송의 시작으로 ‘내 손 안의 TV’라는 말까지 나왔다. 케이블 방송사가 개국하고 IPTV 사업자까지 등장했으나 콘텐츠 파워가 플랫폼의 뿌리를 흔드는 시대가 왔다. 이제 TV는 개인화 된 시청 플랫폼에 위협받으며, ‘먹먹한 침묵이 싫어’ 기계적으로 틀어놓는 일도 생겼다. “굳이 TV를 사야 할까?”

▲ 삼성전자 TV가 대형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가전의 왕자 TV, 키워드는 대형

결론부터 말하면, TV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전의 왕자며,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보인다.

TV 시장이 모바일 기술의 발전 등으로 예전처럼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초고화질 시대를 맞아 초대형 TV 시장이 일종의 돌파구가 되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UHD와 같은 초고화질 콘텐츠가 등장하며 생생한 사용자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70인치 이상 초대형 TV는 UHD, 즉 4K(800만 화소) 이상의 해상도가 필수다. TV가 아무리 커도 시연되는 콘텐츠의 화질이 떨어지면 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UHD TV로 대표되는 초고화질 시장은 최근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수량 기준 처음으로 FHD TV를 추월했고 올해는 1억대 출하가 예상된다. 2014년 대비 약 10배 성장이며 전체 TV시장 중 45%다.

초고화질 TV의 필수기능인 HDR(하이다이나믹레인지 TV) 기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HDR TV 출하량은 지난해 1220만대에서 오는 2021년 4790만대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HDR 기술은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HDR10+와 돌비가 주도하는 돌비비전으로 양분돼 있다.

승기는 삼성전자가 잡았다. 적용되는 TV마다 요금이 부과되는 돌비비전은 운신의 폭이 좁은 반면, 삼성전자는 HDR10+를 오픈소스로 개방해 진영확대를 노리고 있다. 이는 TV를 제조하며 HDR 생태계를 조성하는 원스톱 솔루션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 미국 뉴욕에서 삼성전자 QLED TV 신제품 출시회가 열리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고품질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대목도 중요하다. 과거 TV 콘텐츠는 지상파 방송사와 케이블 채널에 의존해 제한적으로 성장했으나, 지금은 거대 자본을 가진 콘텐츠 제작 유통 업체들이 경쟁하듯 성과를 내고 있다. ‘초고화질 볼거리’가 많아진 시대, 초대형 TV가 성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 손 안의 TV는 영웅의 박치기를 보여줄 수 있어도, 영웅의 땀방울이나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반면 초대형 TV는 초고화질 콘텐츠 시대를 맞아 현실감 있게 전달할 수 있다. TV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창구에서 벗어나 일상의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보장하며 생긴 극적인 변화다. 물론 회의론도 있다. 2000년대 초반에도 70인치 이상의 초대형 TV가 가전 전시회 등을 통해 속속 등장했으나 시장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초고화질 시대다. 2000년대 초반과는 상황이 다르다.

초대형 TV의 성장세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75인치 이상의 TV를 초대형 TV로 규정했을 때, 강력한 존재감이 발휘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전 세계 75인치 이상 TV 출하량은 지난해 119만2000대였으나, 올해에는 47% 이상 증가한 175만7000대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200만대 이상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 출처=이코노믹리뷰DB

올해는 동계올림픽에 이어 월드컵, 아시안게임까지 대형 이벤트도 줄줄이 예정돼 있어 대형 TV 성장세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미와 한국에서 대형화 추세가 뚜렷한 경향을 보이는 장면이 의미 있다. 시장조사업체 GfK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75인치 이상 초대형 TV 시장 수요는 북미(6%)와 한국(6%)이 가장 큰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국내는 과거 대형이라 인식되었던 55인치 수요층이 65인치 이상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시장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2016년 18%에서 지난해 31%로 2배 성장했으며 올해 65인치 TV 시장은 55인치 TV 시장보다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자연스럽게 75인치 TV 시장도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 삼성전자 TV가 대형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초대형 TV 시장, 누가 왕좌에 앉을 것인가?

초고화질 UHD 시대, HDR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면서 자연스럽게 초대형 TV 시장이 열리고 있다. 시장이 성장하고 있으니 남은 관건은 ‘누가 왕좌에 앉을 것인가’다. 현재론 삼성전자가 가장 유력한 후보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GfK에 따르면 65인치 이상 시장에서 42%, 75형 이상 시장에서 50%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면서 대형은 물론 초대형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75인치 이상 글로벌 TV 시장에서 47.4%의 점유율을 기록해 소니(26.3%), LG전자(11.9%)를 누르고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국내는 93% 점유율로 뚜렷한 경쟁자가 없다.

QLED TV를 핵심전력으로 삼으며, 대형 풀라인업을 빠르게 구축한 전략의 승리다. QLED TV를 중심으로 65, 75, 82, 88인치 등 대형 풀라인업을 기민하게 구성해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 먹혔다. 올해 삼성전자는 QLED TV 라인업의 전 시리즈에서 75인치 이상을 출시해 초대형 라인업을 대폭 강화하며 굳히기에 나섰다. 여기서 영원한 경쟁자 OLED TV와의 전략 차이가 보인다. OLED TV는 77인치 한 가지 크기로만 대형 TV 시장에서 승부를 보지만 OLED TV에 비해 다양한 형태의 TV를 만들 수 있는 QLED TV는 일종의 라인업 세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한종희 사장은 최근 뉴욕에서 개최한 2018년형 QLED TV 출시 행사에서 “시장 규모에 상관없이 75인치 이상 판매량을 전년 대비 2배에서 2.5배가량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무작정 TV 크기만 늘리고, 세분화된 라인업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SD급 이상 콘텐츠를 8K수준 고화질로 변환해 주는 AI 고화질 변환 기술과 대형 화면이 꺼져 있을 때도 뉴스헤드라인, 날씨정보 등을 알려주는 앰비언트 모드 등 다양한 제반기술을 개발했다. 올해 1월 CES 2018에서 공개된 마이크로LED 기반의 더 월도 초대형 TV 기술을 준비하는 일종의 정지작업이라 볼 수 있다.

▲ 미국 뉴욕에서 삼성전자 QLED TV 신제품 출시회가 열리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삼성전자 QLED TV가 초대형 TV 시장을 빠르게 공략하는 사이, 경쟁자인 OLED TV도 외연을 넓히고 있다. ‘매혹의 OLED’라는 슬로건을 걸고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자체발광이 가능한 OLED TV도 글로벌 TV 시장의 중요한 플레이어며, 현재 다양한 기업들이 OLED 동맹을 구축해 인상적인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OLED TV의 초대형 트렌드는 한계가 뚜렷하다. 무엇보다 OLED TV가 현재 55, 65, 77인치 세 가지만 공급되는 상황인 점이 뼈 아프다. LG디스플레이가 홀로 공급하는 OLED TV 패널에서 77인치 공급량은 올해 7000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지만 LCD 패널은 올해 2000만대에서 향후 5년 내 3배까지 급성장이 예상된다. 대형 OLED 진영을 주도하는 LG디스플레이가 힘 있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으나 사실상 외로운 전투만 거듭하며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분위기다.

면취효율, 즉 유리기판에서 패널 생산에 사용된 면적비중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일반적으로 면취효율이 높을수록 버려지는 유리기판이 적어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삼성전자가 유리하다. 올해부터 BOE 등 중국 패널업체에서 본격 가동에 들어가는 10.5세대 LCD패널(2940×3370㎜)은 65인치 패널 8장, 혹은 75인치 패널 6장을 동시에 생산하면서도 면취효율이 90% 이상으로 최적화된 세대다.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75인치 TV 시장 확대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8.5세대(2250×2500㎜)에서 생산하는 OLED TV 패널은 77인치를 생산할 경우 약 40%의 유리기판이 버려져(면취효율 60% 수준) 사실상 경쟁력을 상실한다. 올해 OLED TV 패널 생산량이 지난해 174만대에서 올해 287만대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77인치가 7000대 수준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수치다. 70인치대 OLED TV는 사실상 존재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OLED TV의 번인도 논란이다. 특정 이미지나 로고가 화면의 동일한 지점에 반복되어 노출될 경우 화질이 일그러지는 번인현상은 OLED TV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아직 일반인을 대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으나, 이미 유통매장이나 전시장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향후 OLED TV 시장이 성장할 경우 번인 문제도 이와 비례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강력한 성장 잠재력을 가진 OLED TV가 한 고비를 넘기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 삼성전자 TV 라인업 변천사. 출처=삼성전자

초대형 TV, 삼성의 전략에 주목해야

삼성전자의 올해 TV 전략은 프리미엄, 그리고 초대형이다. 서로 일맥상통하는 목표다. 무려 12년간 TV시장 1위 사업자로 군림하며 TV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거듭한 결과다. 삼성전자가 1위 자리에 있었던 12년간 판매한 TV 판매량은 누적으로 5억대에 달한다. 연간 200만대 수준인 국내 TV 시장과 비교하면 약 250배에 달하는 TV가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팔린 TV를 전부 가로로 연결하면 지구를 약 11바퀴 돌 수 있는 길이(약 44만㎞)다.

2006년 와인잔을 형상화한 ‘보르도 TV’를 시작으로 2008년 크리스탈 로즈, 2014년 커브드 UHD TV를 통해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삼성전자는 13년의 연구개발 기간을 거쳐 업계 최초로 카드뮴 프리 퀀텀닷 소재의 상용화에 성공, 올해 QLED TV를 출시하며 LCD TV의 화질을 현존하는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켰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유독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많았던 짝수 해에 승승장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국내 시장의 경우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QLED를 포함한 UHD TV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50%, 75형 이상 프리미엄 TV는 전년 동기 대비 4배 이상 판매량이 성장했다. 최근에는 유연한 마케팅 전략까지 구사하고 있다. 3월 18일 미국에서 출시된 2018년 TV 신제품의 출고가를 전년비 30%대까지 낮추는 등 초대형 시장 확대를 위한 공격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남은 것은 시장의 수성, 그리고 초기술 격차 확대다. 지난해 국내 시장에서 판매된 TV 중 절반 이상이 삼성 TV였으며, 75인치 이상의 경우 10대 중 9대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QLED TV를 중심으로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며 인공지능을 포함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