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약장수가 동네에 와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사람들을 모은 뒤 좋은 언변으로 약을 팔았다. 약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의사의 권위도 절대적이었다. 의사와 약사의 구분도 확실치 않았다.

그럴듯한 의학이론은 진리로 받아들여졌고 약이라면 모두 믿었다.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의약에 대한 도그마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한 예가 합성 여성호르몬(Synthetic Estrogen)이라 불리던 디에틸스틸베스테롤(DES, Diethylstilbesterol)이다. DES는 1938년 영국 옥스퍼드(Oxford) 대학교에서 영국 정부의 지원으로 합성되었지만, 영국 정부의 정책으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아 200개 이상의 제약사들이 자유롭게 제조 판매했다. 여성호르몬의 결핍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질환이나 건강이상 증세 완화용으로 처방되었다. 1941년 미국 FDA는 폐경 증상 완화제 등으로 승인했고 유방암 치료제로 사용되었으며 남성의 경우 전립선 암 치료제로 1985년까지 쓰였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1940년부터 1971년까지 자연 유산 경험이 있거나 임신합병증의 위험 내지 증세가 있는 임산부에게 DES를 처방했다. 이것이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

주로 6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발생하는 희귀암인 여성생식기암(Vaginal Cancer)이 젊은 여성들에게서 발생했다. 1966~69년 4년 사이에 미국 보스턴 소재 빈센트 메모리얼 병원(Vincent Memorial Hospital)에서 15세에서 22세 젊은 여성 7명이 생식기 암 진단을 받았다.

그 가운데 1명만이 성경험이 있었고 그 외에 어떤 특이점도 없었다. 보스턴 지역의 다른 병원에서 1969년 생식기 암에 걸린 20세의 여성이 또 발견되었다.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빈센트 메모리얼 병원 의사들은 이 8명을 대상으로 역학 연구에 착수했다.

각 환자는 같은 병원에서 5일 이내에 태어난 생식기암에 걸리지 않은 대조군 여성들 4명이 대조군으로 선택되었다. 환자와 대조군 모두 합쳐서 총 40명의 젊은 여성들의 생모를 표준 설문서에 따른 심층 인터뷰를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분석결과 생식기암 환자의 생모 8명 가운에 7명이 임신 중 DES 치료를 받았고 대조군 여성의 생모 32명 가운데 한 사람도 임신 중 DES 치료를 받지 않았다. 통계학적으로 p<0.00001로 대단히 유의한 결과다. 임신 중 산모가 DES를 복용할 경우 태어난 여아가 생식기 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 결론이었다. DES 역학 연구결과는 1971년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발표되었고 US FDA는 임산부에 DES 처방을 즉각 금지했다.

1940~71년까지 31년 사이에 DES를 복용한 임산부는 200~300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후유증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DES를 복용한 산모에서 태어난 남성도 후유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2009년과 2012년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아의 경우 고환암과 생식선기능감퇴증 등 비뇨기 질환이 나타난다.

이런 의학적 비극이 어떻게 발생했는가?

모든 의약품은 안전성과 유효성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신약의 안전성은 단기 안전성과 장기 안전성 시험을 거친다. 단기 안전성은 실험실과 동물실험으로, 장기 안전성은 생식독성과 발암성 등 장기 동물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임상시험 기간 중에 안전성이 면밀하게 관찰되며 승인 후에도 안전성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한다. 유효성은 임상시험에 의해 증명된다. 승인 후에도 안전성으로 의약품이 퇴출될 수 있고 많은 의약품이 퇴출된다. DES는 어떻게 된 일일까?

규제 전문가에 의하면 18세기 초기까지도 식품과 의약품 의료 활동에 관한 규제는 없었다. 식품 의약품을 누구나 제조, 수입, 수출 등을 할 수 있었고 원산지, 성분, 효과 등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식품에 대한 알려진 최초의 규제는 1785년 3월 8일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채택된 법으로, 의도적으로 불량식품을 유통하면 처벌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불량식품과 의약품을 규제하는 연방정부법이 1906년 제정되었다. 1930년 미국 FDA가 정식 출범했다. 1937년 영약 (靈藥, Elixir) 사건이 발생했다. 술파닐아미드(Sulfanilamide)와 부동액에 딸기향을 첨가해 영약이라고 부르던 감염 치료제를 복용한 107명의 어린아이들이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1938년 미국은 법으로 의약품의 안전성 검사가 요구되기 시작했고, 유효성의 검증은 1962년에 비로소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DES의 비극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DES는 어떤 안전성 유효성 시험도 거치지 않고 임산부에 처방되었다. DES에 의혹을 지닌 시카고 대학 의대 교수들이 1950~52년 위약 대조군 임상시험을 해 DES가 임신합병증에 효과가 없다는 논문을 1953년 발표했지만, 당시 의료계는 임상시험의 결과를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2년 필자의 재분석에 의하면 DES는 임신 합병증에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임산부에 해가 되었다. 그러나 장단기적으로 해를 끼치는 DES를 맹신한 의사들은 무분별하게 사용했다.

DES등 검증 안 된 의약품들은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고 규제당국은 이런 사건들을 바탕으로 안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엄격한 검증의 필요성과 임상시험 참여자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규제기관의 법과 규정은, 북 치고 장구 치며 솔깃한 말로 약 파는 시대를 끝내고 안전한 의약품, 윤리적 임상시험의 시대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