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인공지능에 이어 이번에는 메를로-퐁티와 인공지능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인공지능에 이어,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것인지 필자는 어설프게 읽고 있는 인문학 책에서도 인공지능을 보려고 한다.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현상학, 특히 생활 세계에 대한 후기의 사색을 발전시켜 행동의 구조와 지각세계의 연구로부터 출발했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전제를 모두 배척하고, 관념으로도 사물로도 환원할 수 없고 인간적 실재의 애매성을 조명하는 동시에, 정치·역사·언어·예술 등 제 문제에 독특한 전망을 열려고 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관념론(Idealism)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체는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정신적으로 구성되었거나 또는 비물질적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관념론은 마음·정신·의식이 물질세계를 형성하는 기초 또는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유심론(Mentalism)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유심론이 유물론에 반해 물질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과 달리 관념론은 의식,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른 인식의 목적 및 기준으로 보는 실재론(Realism)에 반해 정신에 기반하지 않는 객관적 실재의 인식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관념론·실재론은 지식의 본질, 신념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연구하는 인식론(認識論)에 있어서의 구분이고 유심론·유물론은 존재와 존재 되기, 실재 그리고 존재의 범주와 그들의 관계의 속성을 연구하는 존재론의 구분이다. 익숙한 경험론·합리론도 인식론의 구분으로서 경험론(Empiricism)은 감각의 경험을 통해 얻은 증거들로부터 비롯된 지식을 강조하는 이론이고, 합리론(Rationalism)은 인식 원천을 오직 이성에서만 추구하는 이론이다.

내친 김에 간략하게 살펴보면 인식론과 존재론은 존재의 근본을 따지는 형이상학의 분야다. 형이상학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이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를 Physika(자연학)라고 하는 바람에 자연에 있는 존재들의 근본을 연구하는 분야는 Meta-Physika(메타-자연학)이 되어 버렸다. 그 외 철학에는 도덕, 예술 등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있는 개념들에 관한 철학적 주제들을 탐구하는 가치론, 도덕 및 윤리, 즉 ‘옳고 그름’에 관한 철학적 주제들을 탐구하는 윤리학, ‘아름다움’과 예술, 문화와 관련된 철학적 주제들을 탐구하는 미학, 그리고 수학과도 다소 겹치는 판단·추리·개념 등과 관련해 올바른 조리에 관한 논리학이 있다.

짧은 칼럼에서는 다소 장황하지만 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논의를 하는 이유는 인공지능이 이러한 문제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이러한 철학적 논쟁의 늪(?)으로 들어서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철학적 논의들은 아주 실재적 아이디어로 접근하는 인공지능의 기술에 대한 논의를 정교하게 하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이나 동영상에서 사물이 인식하는 인공지능의 비전 연구에서 요절한 천재로 통하는 데이비드 마아는 기호적 인공지능에 앞서 시각 기관 자체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물리적 시각기관에서부터 추상적인 기호적 인공지능을 포괄하는 모델을 제시하면서 사이버네틱스의 정신을 계승했다. 인공지능 연구에 있어서 단순히 추상적인 정보처리만이 아니라 지능이 존재하는 물리적인 생물의 몸 자체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로드니 브룩스로 이어졌다. 그는 로봇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MIT 인공지능연구소의 소장이었고 지금은 리씽크로보틱스의 회장이다. 기호적 인공지능도 인공 신경망도 아닌 행위 기반 로보틱스로 유명해졌는데, 이는 인지과학의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 이론과도 공유된다. 또한 어쩌면 인공지능에 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디애나 대학 컴퓨터 과학과 교수인 더글라스 호프스테트, 그리고 프레임 이론으로 유명한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인간의 모든 추론의 기반은 몸에 기반을 둔 ‘유추(Analogy)’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지능적 기계의 물리적인 토대에 대한 이러한 인공지능의 연구 아이디어들은, 딥러닝의 유행 속에 다시 묻힌 감이 있지만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더 나은 딥러닝을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인공지능을 위해서 고려되어야 한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인공지능 아이디어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철학을 당시 활발히 연구되던 형태심리학(게스탈트 심리학, Gestalt Psychology)이라는 새로운 지각이론으로부터 발전시켰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체라고 부르는 대상은 단순히 감각에 따른 경험으로서 만도 아니고 순수하게 정신적인 능력에 의한 것 아니다. 순수한 지각이나 순수한 정신(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은 이미 세계 내에 존재하는 신체(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각은 이미 세계와 의식의 덩어리이므로 우리의 모든 생각은 한순간도 지각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지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메를로-퐁티에게 언어도 예술도 윤리도 지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단어도 단일하게 일정한 대상을 지칭할 수 없고, 세잔의 그림은 보이는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나 도덕은 주어져서 지켜져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언어도 예술도 윤리도 세계 속에 존재하는 신체의 지각을 통해 그의 의미가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메를로-퐁티의 주장이 관념론·실재론, 유심론·유물론, 경험론·합리론, 형이상학, 가치론, 윤리학, 논리학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견해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게 하고 필자는 넓은 의미에서 구성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딥러닝 기계학습은 데이터로부터 지능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경험론적이라고 간주되어야 할까? 인공지능은 지능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유물론이라고 해야 할까? 딥러닝의 계층적 구조는 경험을 규정할 수 있는 관념을 만드는 관념론적 접근이 아닐까? 2개의 언어를 짝으로 학습하는 언어번역으로 인간이 감지하는 문장의 복잡다단한 느낌을 살릴 수 있을까? 고흐풍으로 그려내는 딥러닝의 그림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딥러닝은 실제 고양이와 인형 고양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 내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거나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조차 힘들다면, 그 모든 것을 제대로 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우리 인간을 좀 더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온 철학을 좀 더 관심 깊게 살펴보아야 하고, 인간에 대해 생물학적인 토대를 연구하는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에 좀 더 관심 깊게 살펴보고 이들을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것이 슬기로운 인공지능 연구생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