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나르코스>에는 악명높은 마약조직 칼리 카르텔의 실체를 고발하려는 내부고발자 호르헤가 등장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미국 마약단속국 요원들과 공조해 끝내 칼리 카르텔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하지만,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게 된다.

내부고발자의 끝은 어떨까? 용기를 내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끝은 씁쓸하기 이를데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내에서는 지난해 4월 공익신고자 보호법을 공포해 내부고발자를 적극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신고 대상을 확장하는 개정안이 발의되어 오는 5월 시행을 앞두고 있고,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이 14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탈세와 불법 재정지출도 고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 등 의미있는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말이 나온다.

▲ <나르코스>에서 내부고발자로 등장하는 호르헤. 출처=넷플릭스

내부고발자를 적극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ICT 기술의 발전으로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SNS의 등장과 함께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인터넷의 특수성이 더해지며 이른바 익명고발이라는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부고발자를 색출하고 어떻게든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 고통을 주려는 이 사회의 '갑'들을 피해 피눈물만 흘리던 '을'들의 '게릴라 전'이다.

직장인 익명 SNS 블라인드가 대표적이다. 가입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회사 직원이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회사 메일로 가입신청을 해야하며, 가입을 위해 필요한 시간도 길다. 가입한 사람들은 각 직군별 라운지를 통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조다. 회사이름은 노출되지만 개인은 철저히 익명을 보장한다.

블라인드는 직장인 익명 SNS로 입소문을 타며 종종 상당한 파급력을 일으켰다. 땅콩 회항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논란도 최초 발화점은 블라인드다. 블라인드를 통해 조 부사장의 행동이 거론되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직장인들이 블라인드를 통해 모여 익명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Me Too 운동도 블라인드를 통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많은 직장인들이 블라인드에 모여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의 성추행 이야기를 꺼냈고, 이는 Me Too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자신의 실명을 걸고 Me Too 운동에 동참하기는 어려운 직장인들이 블라인드를 통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블라인드만 익명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페이스북에는 각 직군별, 산업별 ‘대나무 숲’으로 명명된 익명의 공간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로 운영되며 운영자가 사연을 받으면 페이지에 공개하는 방식이다. 최근 논란을 일으켰던 대학병원의 간호사 장기자랑, 동아리 구타 등의 최초 발원지다.

다소 결은 다르지만 취업포털인 잡플래닛은 익명으로 구동되는 기업평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직장에 재직하고 있거나 퇴직한 경우 직장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고 별점도 줄 수 있다. 밖에 알려지지 않은 조직의 문제가 폭로되는 경우도 있다.

법과 제도의 미비로 내부고발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서 ICT 플랫폼을 중심으로 다양한 익명 폭로가 가능해졌다. 얼굴과 이름을 걸고 전면에 등장해 내부고발에 나선다면 가장 확실한 폭로가 가능하지만, 사정상 어려울 경우 ICT 플랫폼의 익명성이 도움을 주는 시대가 왔다.

▲ ICT 익명성에 기대어 폭로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출처=픽사베이

다만 익명성에 기대어 폭로가 진행되기 때문에 부작용도 만만치않다. 내부고발자의 절규에 편승해 사익을 취하거나 누군가를 음해하기 위한 시도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사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해 익명에 기댄 폭로를 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음해성 조작도 번번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직장인 SNS인 블라인드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블라인드는 “하루에도 많은 글이 올라오며 우리는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 다 모르는데다 안다고 해도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서 “다만 성인 직장인 커뮤니티이므로 유저들의 자정작용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익명 폭로를 모두 검수할 수 없으며, 최소한의 자정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경우 대부분 신고에 의해 자동으로 게시물이 내려간다는 설명이다. 블라인드는 “4년간의 커뮤니티 운영 경험을 통해 게시물 숨김 및 비공개 로직을 연구했다”면서 “문제가 되는 내용은 신고에 의해 자동으로 블라인드 처리되도록 시스템이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블라인드의 답변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이다. 결국 커뮤니티의 자정능력에 기댈 수 밖에 없으며, 알고리즘에 의한 로직으로 자동 검수 시스템을 고도화시키고 있으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외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플랫폼 사업자들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나무숲도 마찬가지 고민이 있으며, 잡플래닛에도 비슷한 문제제기가 있다. 간혹 앙심을 품고 퇴사한 인물들이 직장에 대한 근거없는 험담을 늘어놓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블라인드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Me Too 운동이 한창일 때 블라인드가 전용 라운지를 만들어 직장인들의 내부폭로를 끌어낸 적이 있다. 폭로에는 적나라한 직장 이름과 실명이 나와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자 블라인드는 이를 언론에 알리며 Me Too 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를 바탕으로 논란이 된 직장의 이름이 적나라하게 알려지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결국 블라인드는 언론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내부고발자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치기 어려울 경우, ICT 플랫폼을 통한 익명 고발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익명의 특수성은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다. 법과 제도의 보완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지점이라는 말이 나온다. 유시민 작가는 15일 방송된 tVN <썰전>에 출연해 Me Too 운동의 가치를 설명하며 "누군가 기획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있을것"이라면서 "그 과정에서 혼탁한 일이 생길 수 있지만, 끊임없이 고민하며 폭로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