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지배 단위가 처음 형성되던 시점부터 ‘군대’와 ‘국가’의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여왔다. 초창기 군대는 적국을 침공해 부족한 자원이나 적의 재산을 탈취하고, 잠정적인 주변 위협을 제거하는 목적이 강했지만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목적이 강해졌다. 여기서 다시 정치와 외교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로 들어서면서 ‘군사력’은 국력과 직결되는 요소가 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협상을 위한 카드가 되기도 했다. 프러시아의 전략가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말했듯, ‘전쟁은 정치의 또 다른 수단(War is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군사력”은 국가 지배자의 입장에서 양날의 칼 이기도 했다. 군주의 입장에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군사력을 통제할 권력이 반드시 필요했으나, 반면 조직화 된 군대는 충성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국내에서 군주 자신을 향하는 칼이 될 수도 있었다.

 

역사적 기원-공화정과 탄생한 민간 통제

전통적으로 고대 시대에는 국왕이나 국왕의 대리인이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최초로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표가 통수권을 갖게 된 첫 사례는 로마 공화정 시절의 집정관(執政官: Consul) 제도다. 선출직으로 공직 최고의 자리였던 집정관은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아 1년씩 집무하는 형태로 운영됐으며, 평소에는 두 사람의 합의를 통한 방법으로 행정권과 군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두 사람의 합의를 통한 방식으로는 위기 시에 의사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비상사태가 됐을 때에는 한 명의 독재관(Dictator)를 임명한 후 국가 전권을 부여했다. 당연히 권력을 한 손에 쥔 독재관은 말 그대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독재권이 부여된 위기 사태가 종식됨과 동시에 사임하거나, 6개월 임기가 만료하면 의무적으로 사임하도록 강제했다. 전시와 평시의 권력 분산과 집중을 적절하게 활용한 로마는 건국 초부터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까지 이 제도를 잘 활용하여 국가 위기를 막았으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 장군 같은 훌륭한 독재관을 뽑아 국난을 극복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는 제도였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존재했으며, 술라(Sullas)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같은 이들이 이들 제도를 악용하면서 공화정은 사실상 무너지게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 한 점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성립을 기치로 삼았던 프랑스 대혁명 때에도 로마의 역사가 반복됐다는 점이다. 1794년 테르미도르(Thermidor) 쿠데타로 프랑스 집정관에 올라있던 폴 바라스(Paul Barras, 1755~1829) 덕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1797년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고 상승장군(常勝將軍)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이집트 원정, 팔레스타인 원정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할 인기와 세력을 축적했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Brumaire)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샤를-프랑수아 레브룬(Charles-Francois Lebrun), 장 자끄 캉바세레스(Jean Jacques Regis de Cambaceres)와 삼두정치를 표방하며 제1 통령 직에 올랐다. 하지만 훗날 그가 황제로 오르는 과정에서 ‘쿠데타’라는 군사 수단을 사용하여 정부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는 점은 프랑스 혁명의 명분을 퇴색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과 ‘민간 통제’의 기본적인 틀을 잡은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왕정 정치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기 때문에 더더욱 “민의”에 의한 국가 통제와 권력의 분산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 결과 행정부의 모든 기능에는 권력분산과 민간 통제라는 대원칙이 녹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권리, 즉 선전포고에 대한 권한이다. 미국은 헌법 제 1조에 따라 미 의회 만이 전쟁 선포 권한을 가지며, 대통령은 헌법 2조에 의거하여 군 최고사령관(CIC: Commander-in-Chief)을 겸하게 된다. 하지만 의회와 대통령의 의견이 다를 경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군을 동원할 가능성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를 대비하여 마련된 것이 1973년에 통과된 전쟁권 결의안(War Power Resolution of 1973)이다. 이 법안에 따라 미 대통령은 군사 행동을 명령하기 전 48시간 이전에 반드시 의회에 통보해야 하며, 의회의 합법적인 무력 사용에 대한 승인 혹은 선전포고가 있어야 한다.

사실 군의 통제 문제는 서방 뿐 아니라 공산국가도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주제인데, 소련을 비롯한 일부 공산국가는 공산 이데올로기의 지속적인 교육과 민간 통제(civilian control)를 위한 완충장치 개념인 정치장교(Political Officer) 제도를 운영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의 사례인데, 중화인민공화국도 “정치위원(政治委員)”이라는 형태로 당 출신의 민간인에게 군 계급을 주어 정치 장교의 역할을 맡기고 있으나 동시에 반대 진영인 중화민국(대만) 군도 정전관(政戰官)이라는 이름의 정치장교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대만의 이 제도는 소련에서 교육받은 2대 총통인 장징궈(蔣經國)가 도입한 것이다.

 

탄생의 진통 – 미국이 경험한 군-민의 충돌

이렇게 군 통수권에 대한 민간 통제를 제도화한 미국이지만, 미국조차도 군이 민간 통제권자에게 항명을 했던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군이 민간 통제 권한에 도전한 사례가 가장 많았던 ‘위험한 세월’은 남북전쟁(1861~1865)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북군의 유력 지휘관으로 떠오른 조셉 후커(Joseph Hooker, 1814~1879) 장군은 공공연하게 정부와 군을 총괄할 ‘독재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링컨 대통령은 그를 북군 주력 군인 포토맥(Potomac) 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최근 장군께서 군과 정부에 독재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하신 것 때문에 장군을 포토맥 군 사령관에 임명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입니다. 오직 승리하는 장군만이 독재관이 될 자격을 갖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장군께 기대하는 것도 군사적 승리 뿐이며, 독재의 위험은 대신 제가 감당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후커 장군은 챈슬러즈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남군에게 대패했으며 결국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 직전에 해임당하고 율리시즈 그랜트(Ulysses S. Grant, 1822~1885) 장군과 교체됐다. 한편 그랜트 장군은 군인의 정치 불개입 원칙에 철저했는데, 일단 그 자신부터 평생 투표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정치 성향을 알 수 없었다. 그가 1863년 빅스버그(Vicksburg) 전투에서 승리하자 민주당은 현임 링컨 대통령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영입을 타진했다. 심지어 이후에는 공화당 일각에서까지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밀어보려 했으나 그랜트는 현역 신분임을 이유로 두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그는 1868년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 육군 총사령관 직을 끝으로 전역한 후 민간인 신분이 된 뒤의 일이었다.

민간인 통수권자의 결정에 항명을 했다가 해임을 당한 사례도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625전쟁 중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임당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사례일 것이다. 그는 1951년 주 일본 스페인 및 포르투갈 대사관에 방문해 향후 전쟁을 확전 할 것이며,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까지 불사할 것임을 시사했다. 두 대사관은 해당 내용을 비밀 전문 형태로 본국에 보냈으나 미 정부가 가로챘고, 이 내용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의 발언이 ‘전쟁을 시작한 곳에서 끝낸다’는 행정부 방침과 충돌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국 그는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 국무장관과 협의 끝에 맥아더 원수가 “정책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성명을 내지 말라”는 대통령 지침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해임을 결정했다. 이 해임에 대해서는 뒷말도 많을 뿐 아니라 올바른 결정이었는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란이 존재하나, 어쨌든 이 사건은 군 최고 지휘관과 민간 통수권자의 의견 충돌이 발생했을 시 “민간 통제”에 의거해 대통령의 명령이 우선함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오늘날의 민간 통제 원칙

민간 통제 원칙을 제일 먼저 수립한 것은 미국이다. 건국의 동기 자체가 왕정 지배와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고 있으며, 항상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한 권력의 분산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도 모든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 대통령과 의회 뿐 아니라 국방장관 및 3군 장관(육군장관, 해군 장관, 공군장관) 또한 민간 통제의 중요한 한 축을 맡는다. 민간인인 국방장관은 3군의 지도자이자 최고 결정권자이며, 그보다 상위의 권한을 갖는 이는 대통령과 의회 뿐이다. 국방장관은 대통령이 지명하지만 반드시 미 상원의 인준을 거쳐야 하며, 1947년에 통과된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에 의거해 군에서 소령 이상의 계급을 가졌던 이는 전역 후 7년 이내에는 장관 직에 임명될 수 없다. 하지만 대장 예편 후 3년 만에 장관에 임명된 현임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1950~) 장관은 이 조항에서 예외에 속하는데, 이는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해당 조건의 면제를 승인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예외는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1880~1959) 원수를 포함해 지금까지 단 두 사례 뿐이었으며, 마셜 장관 또한 상원의 동의가 있었기에 임명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국방부 산하 각군의 최고 수장인 육군, 해군, 공군장관 또한 국방부 장관과 동일한 조건을 채워야만 임명이 가능한 민간 직위다. 이들은 각 군의 행정, 인사, 양병(養兵)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해당 군의 최고 선임자인 참모총장은 이들 민간 출신 장관을 보좌하고 군을 대표해 합동참모본부 회의의 일원이 된다. 또한 합동참모본부 회의를 주관하는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군사, 전략, 전술, 안보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한다.

 

민간 통제의 의미

민간 통제 원칙의 중요성은 “만약 우리 헌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군에 대한 민간 통제입니다”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말처럼 현대 국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하지만 민간 통제의 의미가 꼭 “군인 출신은 행정부의 관료가 되어선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현역 신분이 군의 통수권을 갖지 못하도록 하여 국가 최고의 ‘무력’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역할을 분산시켰을 뿐이다. 민간 통제 원칙은 국가 최고의 무력을 가진 기관이 그릇된 방향으로 힘을 쓰지 않게끔 하려는 안전장치이며, 국가의 중대사를 민과 군이 함께 결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일례로 대통령이나 입법부, 행정부 수장은 군의 행정, 인사, 적국을 상대로 한 개전, 특정 목표에 대한 공격 여부 등을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되지만, 전문적인 군사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하기 마련이므로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아온 전문 군인과 지휘관의 조언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민간 통제의 본질적인 의미는 현 미 국방부장관인 제임스 매티스 장군의 자서전 <전사와 시민: 미국인의 관점에서 본 우리 군(Warriors and Citizens: American Views of Our Military)>에 나온 한 구절이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듯 하다.

“건전한 민-군 관계의 핵심은 민, 군 양쪽이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은 군을 신뢰하여 군이 가장 객관적인 조언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민간 결심 수립자가 최종 선택한 정책안을 받아들이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군은 민의 신뢰를 사 민간 정책 수립자가 군의 조언을 올바르게 청취하고 명백한 정치적 이유로 군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거부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 민은 또한 반대가 불복종과 같은 의미가 아님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