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생각> 리자 니엔하우스 지음, 강영옥 옮김, 리오북스 펴냄

 

경제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저술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비전공자에게는 이 책이 유용할 것 같다. 세계경제사를 이끌어온, 지금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사상가들의 이론뿐 아니라 생애, 에피소드를 알기 쉽게 정리하여 부담 없이 읽히기 때문이다. 책에는 플라톤을 비롯해 이븐 할둔, 카스파르 클록,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리스트, 칼 마르크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우징리안, 제임스 토빈, 마틴 펠드스타인, 벤 버냉키 등 66명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2인을 소개한다.

 

◆ ‘아베노믹스의 정신적 지주’ 다카하시 고레키요(1854~1936)

1936년 2월 26일 새벽 일본 육군의 보수파벌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1483명의 병력을 이끌고 눈발이 흩날리는 적막한 도쿄의 거리에 진입했다. 이들은 아카사카에 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장관 사택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부수며 2층 침실로 쳐들어갔다. 장교 한 명이 군화 소리에 놀란 다카하시에게 “배신자!”라고 외치더니 권총 여러 발을 발사했고, 침대를 에워싼 병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하늘에서 내리는 벌!”이라며 81세 老장관의 몸을 난자했다. ‘2·26 군사반란사건’이다.

당시 다카하시 재무장관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 예산을 축소하려고 했고, 필연적으로 일본 군부의 거센 반발을 샀다. 동아시아 국가에서 군국주의에 맞서 싸운 최후의 보루였던 그가 암살된 이후 일본의 정치는 서서히 군사독재와 전쟁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1929년 세계경제공황이 발발하자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엔화의 가치는 올라가고, 무역적자는 증가했다. 특히 농촌의 빈곤과 실업률이 급증했다. 1931년 말 재무장관직에 오른 다카하시는 급진적인 조세정책을 내놓았고 금본위제도를 폐지했다. 저금리를 도입했고, 국채를 발행하여 예산적자를 메웠고, 재정으로 중공업을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을 발표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의 신속하고도 과감한 ‘케인스적’ 경제정책 덕분에 일본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디플레이션 쇼크를 피할 수 있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일곱 차례나 재무장관을 지낸 다카하시를 ‘일본 경제와 금융정책의 정신적인 아버지’라 부른다. 아소 다로 재무성장관은 “현재 일본의 경제정책은 다카하시가 일본 경제를 공황에서 구출할 때 적용했던 바로 그 정책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베노믹스가 아니라 다카하시노믹스라는 말도 나온다.

 

◆ ’여성인권운동가·자유주의 사상가’ 해리엇 테일러 밀(1807~1858)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있다. 부인 해리엇 테일러 밀이다. 해리엇은 에세이 <여성의 해방>을 제외하고는 별도의 경제분야 저서가 없다. 하지만 남편 밀은 명저 <자유론> 서문에 “내가 수십 년간 쓴 모든 글은 나와 아내가 함께 맺은 결실이다”라며 해리엇이 사실상 공저자임을 밝혔다.

밀은 <경제학 원리>에서 분배의 문제를 다뤘고 사회주의를 예찬했는데, 이 부분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해리엇의 영향인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다룬 장은 해리엇이 직접 집필했다는 설도 있다. <자유론>에서 밀이 국가의 강요를 사회적 압력과 동일시한 것도 아내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해리엇은 여성해방·과잉인구 억제·노동자계급의 신분상승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천착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세 가지가 자유주의의 핵심 쟁점이며, 교육으로 모두 해결 가능하다고 봤다. 많이 배워 지식을 쌓게 되면 일이 쉬워져 생산성이 높아지며, 더 책임감 있게 가족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초창기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자유주의 사상가였던 해리엇은 “머지않아 모든 국민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구체적으로는 여성에게도 노동과 직업의 자유, 동일한 임금, 소유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여성은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다’는 당시의 혼인법 규정은 반드시 타파해야 할 악법이었다. 해리엇은 일자리를 빼앗긴다며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반대하던 남성들에게 “노동시장의 경쟁은 사회전체의 이익”이라고 반박했다. 집안살림과 자녀양육은 누가 책임지느냐는 남성들의 불만에는 “경쟁자 중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것은 폭정이나 다름없다”고 반격했다.

‘공처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평생 아내의 공을 인정하는 데 거리낌 없던 남편은 아내가 먼저 떠나자 남프랑스 아비뇽의 생 베랑 묘지에 묻힌 아내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이 시대의 진보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니, 그녀처럼 위대한 정신과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 몇 명만 더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이룩할 날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