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와 1970년대 작가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리로 나선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은 기존의 문화적 지배를 하던 파리 화파에 대한 반항과 문화사업이 뒤덮고 있는 미술계에 대한 반발로 거리로 나왔다. 플럭서스 운동의 몇몇 작가들은 도시를 새로운 예술공간으로 보고 거리로 나왔고, 미국에서는 1930년대 멕시코의 벽화주의처럼 반전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민중의 정치 활동 일환으로 거리로 나섰다.

이 시기에 가장 대중적인 형태로 거리로 나온 작가들이 있다. 바로 그래피티 작가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거리의 미술 중에 가장 활발하게 대중에게 흡수되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두 지역 중 어느 곳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사람들은 1960년대 말 필라델피아의 콘브레드(Cornbread)라는 서명(Tag)을 시초로 보고 있다. 그 이후 뉴욕의 브롱크스 거리에서 낙서화가 범람하면서 그래피티가 본격화된다.

그 당시의 그래피티는 반항적 청소년들, 흑인, 푸에르토리코인들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중심이 되어 강렬한 색채감, 생동감과 속도감을 지닌 그림이 주류였다. 마치 브랜드 로고처럼 자신을 확실히 나타내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문자, 그림을 거리의 벽과 지하철 같은 대중적인 장소에 표현했다. 그래피티는 초기에는 예술로 평가받지 못하고 거리의 골칫거리로 취급됐지만, 이탈리아의 아트페스티발에 그래피티가 참여하면서 그 이후 뉴욕에서 예술적 상품가치로 인정받으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그래피티가 1960년부터 시작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30년 늦은 1990년대 힙합과 함께 소개된다. 이 당시 한국에서의 그래피티는 외국에서 30년 동안 올드 스쿨과 뉴 스쿨로 발전한 전 과정을 한꺼번에 흡수하며 활동하게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그래피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석규 작가도, 처음 그래피티를 시작한 계기는 초등학교 때 유명한 <힙합>이라는 만화를 접하면서부터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작가는 힙합의 세계에 빠지게 됐고, 힙합에 심취하면서 그래피티를 접하게 되었다.

2003년 이후 이석규 작가는 본격적으로 만화 ‘외계소년 위제트’에 나오는 위제트에서 따온 위제트(WEZT)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그래피티는 대부분은 반항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조금 다르다. 그의 작업은 초기 그래피티 작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의 필명을 다양한 그림도구를 활용해 표현하고, 벽에 그려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그 작품은 때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하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작가 자신을 알리는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다.

현재, 그의 그래피티 작품은 서울의 벽뿐만 아니라 전 세계 그래피티 작가들과 소통하며 해외 어느 곳의 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석규 작가 작품은 벽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벽 이외에도 캔버스의 세상에도 그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항의 의미로 시작된 거리의 낙서가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미술이라는 체제에 들어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석규 작가는 향후의 그래피티의 방향성에 대해서 “스트릿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온 그래피티 작가들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래피티 작가의 그림을 보여주고, 대중에게 그래피티 작가인 것처럼 소개하는 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래피티 전시를 할 때도 그래피티의 역사나 오리지널 그래피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2017년 한 해 동안 그 어느 해보다 많은 그래피티 전시가 있었다. 그것을 지켜본 그래피티 작가들이 느끼는 것들을 대변하는 그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앞으로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기획되는 그래피티 전시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2016 페루 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