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해 본 적이 있는가. 잠들기 위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누군가를 향한 분노에 어느 새 태양이 떠오르는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나의 이 괴로움과 고통이 그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밥 한 톨을 목으로 넘기지 못한 적이 있는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결코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던 경험이 있는지.

그 날. 회사에서 발행한 약속어음 4억8천만 원이 도래하는 날이었다. 회사는 그 다음날 은행 마감시간인 오후 6시까지 약속어음과 당좌수표의 각 거래은행에 위 금액을 입금시키지 않으면 최종 부도를 맞을 위기에 처하게 되어있었다.

회사가 발행한 약속어음은 생산하던 제품의 영업을 독점으로 판매하던 총판에 담보로 제공한 것이었다. 의약품을 생산하던 회사는 약 2년 전부터 국가 정책의 시행이었던 전문 의약품의 보험수가 53.55%로 하향 조정 때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의 규모를 지닌 회사는 이런 일괄 조정의 시기를 잘 극복 할 수 있겠지만, 약 250억 규모의 중소 생산업체의 경우에는 그대로 영업이익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에, 총판을 하던 업체들로부터 매년 지나친 담보를 설정할 것을 요구받았고, 회사는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날 도래한 어음과 당좌수표 전액이 특정회사의 것이었다는 것은, 회사를 의도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했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점이다.

나는 새롭게 계약을 체결한 총판업체에 그날 아침에 찾아가 회사의 급박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당장에 부도가 날 수 있으니 긴급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제조사인 우리가 부도가 나면 당장 당신 회사에게도 불똥이 튀기니 도와달라고. 그러자 그 회사의 대표도 수긍하며 긴급자금을 마련해 준다고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은행 마감시간까지 입금해 주겠다고. 그러나 하루 종일 그 대표는 어디에선가 누군가와 상의하는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한 시간 지나갈 때마다 불안한 시간이 지속되었지만, 철썩 같이 약속을 하였기에, 믿고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가 회의실에 있으면서 가끔씩 나와서 얼굴을 내비칠 때마다 그는 은행 마감 시간 내에 틀림없이 회사에 5억 원을 입금하겠다고 재차 확인하였다.

갑자기 그는 다른 제안을 해 왔다. 그동안 우리가 생산해 온 제품에 대한 허가권 및 상표권 원본을 첨부해서 이 제품에 대한 양도양수계약서를 공증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회사는 최종부도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일단 제품의 허가권 및 상표권의 원본을 주지 않으면 긴급자금을 마련해 줄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다. 회사는 마지막까지 긴급자금을 줄 것을 믿고 제품양도양수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공증까지 해 주었다.

결국, 그 회사는 은행 업무시간까지 입금하지 않았다. 그리고선 그 대표는 통장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보세요. 입금 시킬 돈이 통장에 없네요. 어쩌죠?”

 

나는 기억한다. 어쩌죠? 라고 하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있었음을. 보세요.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듯한 조롱이 함께 묻어있었음을.

결국, 한 해 매출 250억에, 30년간 의약품 생산을 하던, 한 작은 중소기업은, 그렇게 그 날 하루, 약 80여명의 직원들은 신성한 일터를 잃었으며, 매출의 약 50%에 해당되는 제품 허가권을 다른 회사에 빼앗기고, 어음 4억8천만원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를 맞았다.

어음을 막지 못한 그날은 비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렸고 바람까지 불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에게는 언젠가 가보았던 영국의 요크셔 지방의 하워드 마을을 떠오른다. 그 황량한 고장은 내가 방문했던 7월에도 스웨터를 입고 있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낮고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오직 바람과 빗방울이 전부인 것 같은 그 지역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탄생시켰다. 브론테 자매가 살던 박물관은 밤새도록 비를 맞았고, 바람을 막아냈다. 황무지를 거침없이 횡행하고 나서 박물관의 문짝을 흔드는 바람소리는 주인공 캐서린의 악령이 살아나서 울부짖는 비명 같았다. 창문만 열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무엇에 그리도 분노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캐서린의 가족들을 파멸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캐서린과 그의 오빠, 그리고, 캐서린의 남편과 심지어 자신의 자식마저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분노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혹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캐서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러한 분노를 단지 주인집 따님이었던 캐서린에 대한 단순한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3대에 걸친 그의 분노가 너무 거창한 것이 아닌가.

부도가 난 다음 날, 통장을 보여주며, ‘자 봐라. 통장에 돈이 없다’ 라고 말했던 그 대표가 그 회사의 직원 몇 명과 함께 무더기로 회사로 찾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우리 회사의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보려고 온 것인지, 아니면 부도가 난 것을 놀리려고 온 것인지, 그는 이야기했다.

“자, 회장님. 이제 제품 허가권은 저희에게 있으니, 이제 제품을 생산하는 계약을 맺으시죠.”라며 새롭게 작성한 계약서를 나와 아버지께 들이 밀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 가족에게 느꼈던 서러움은. 집시로서 결코 한 집안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고아 출신의 히스클리프가 느꼈던 서러움은. 그는 캐서린과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온 몸을 가족들에게 두들겨 맞아 전신이 아팠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캐서린의 오빠가 늘 던져주는 폭행과 폭언에 그는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갔다. 황량한 바람과 빗방울의 마법에 걸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도를 막을 만한 긴급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바꾸어 제품 허가권을 빼앗아가고, 바로 다음 날 바로 찾아와서 계약의 주체가 바뀌었으니 쌍방 간에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점차 분노로 바뀌는 바람과 빗방울의 전주곡은 아닐는지. 히스클리프는 수없는 동정과 애정을 가지고 캐서린의 가족들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독립을 하고, 그가 받은 무시와 멸시를 되갚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을 것이다. 교회의 탑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그처럼 허전하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가 자기도 모르게 수그러지고 콧구멍으로부터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나오는 것을 느끼는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히스클리프는 그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도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분노의 끝은 무엇이냐고. 나는 말한다. 분노의 칼날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된다고. 분노의 방향은 과거의 나 자신을 향해야 한다고. 히스클리프는 이야기한다. 그의 분노는 캐서린 집안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했어야 했다고. 그래야 요크셔 지방의 황무지에서 불어대는 바람과 빗방울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해 다시 집어 든 500페이지의 <폭풍의 언덕>은 단순한 비뚤어진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어렸을 적 보았던 사랑의 집착은 남아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 다른 것을 발견했다. 영국사회의 관습과 상속법, 그리고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집시 출신인 젊은이가 상류사회로 가기위한 치밀한 계략과 가진 자에 대한 한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히스클리프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돈과 분노로 가득찬 복수심이었다. 분노는 그를 용의주도하게 만들었고, 재산과 신분 상승을 위해 잠을 줄이게 만들었다. 결국, 그의 복수심은 자신의 부인과 아들도 죽음으로 몰아갔고, 그마저 비참한 최후에 이르게 했다. 아직도 요크셔 지방위로 불던 그 바람소리와 캐서린의 유령이 되어 지르는 소리가 “입금 시킬 돈이 통장에 없네요. 어쩌죠?”라고 하던 그 소리와 함께 공허하게 들린다.

 

정재엽 (주)아이메디신 이사. 금수저로 살아온 그에게 갑자기 닥쳐온 가족 기업의 부도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남다른 감수성으로 일과 생활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칼럼 <낭만적 기업회생 이야기>는 경영일선에서 만난 일과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문학과 함께 공존하고자 하는 그의 행보이다. 저서로 <파산수업>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 있다. j.chu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