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태주 시계 전문 페이지 <블랙북> 운영자] ‘내가 가장 먼저 해냈다’란 성취감은 모든 명예 중에서도 손꼽힌다. 때문에 최초라는 타이틀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몇몇의 경우, 최초라는 타이틀은 돈을 벌게 해주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원조’ 맛집에 손님이 몰리는 이유에서부터 거대 기업이 성공할 수 있는 이미지메이킹까지, ‘최초’라는 타이틀의 힘은 그만큼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최초라는 타이틀 경쟁이 가장 치열한 장르 중 하나가 바로 시계다. 시계 브랜드 마케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시계의 ‘최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 최초의 손목시계는 어떤 브랜드의 시계일까. 역사 속 기록을 통해 그 진실을 알아보자.

 

기록 속 최초의 손목시계. 1571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시계

▲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출처=셔터스톡

시계가 발명되었을 당시 손목시계는 지금과는 반대로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안 그래도 비싼 액세서리에 ‘시계’라는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얹으면 그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뛰었기 때문에 손목시계는 여왕과 귀족 여성만이 누리는 취미였다. 기록상 최초의 손목시계 역시 1571년 로버트 두들리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증정한 시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손목시계를 증정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브랜드에 대한 기록이 없어 최초의 손목시계를 만든 브랜드의 리스트에서는 제외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초로 브랜드의 이름이 남은 손목시계. 1812년 브레게의 시계

▲ 시계 브랜드, 브레게(Breguet). 출처=브레게

1810년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나폴리의 여왕인 카롤린 뮈라가 브레게에 주문한 손목시계가 브레게의 문서기록에 남아있다. 당시 시계를 제작한다는 것은 100% 수작업에 최소 2년 이상 시간이 걸리는 고급 노동이었고 브레게는 왕실에 시계를 납품하던 회사였다. 브레게급의 회사가 아니면 만들 수 없었던 것이 시계였기 때문에 이 기록은 꽤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카롤린 뮈라가 시계를 주문하고 2년 후 시계가 완성되어 1812년 브레게에서 카롤린 뮈라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공식적인 최초의 손목시계, 1868년 파텍필립의 시계

▲ 공식적인 스위스 최초의 손목시계. 파텍필립. 다이아몬드 장식을 열어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파텍필립

파텍필립은 현존하는 시계 브랜드 중 자타 공인 단독 1위 브랜드다. 기술력도, 디자인도, 역사도 파텍필립이 1위라는 데에 이견을 낼 수 있는 브랜드가 없다는 데에서 그 유일함이 강조된다. 독보적인 브랜드인 만큼 공식적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최초의 손목시계 타이틀도 파텍필립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파텍필립이 최초로 ‘진짜’ 손목시계를 만든 브랜드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분분하다. 손목에 차는 시계는 맞지만, 이것을 손목시계로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팔찌에 시계 기능이 달린 액세서리로 봐야 할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최초의 손목시계는 파텍필립의 것이 맞다.

 

손목시계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모델, 1880년 지라드 페리고의 시계

▲ 지라드 페리고에서 제작한 최초의 손목시계. 격자 형식의 가드가 시계를 보호했다. 출처=지라드 페리고

세계 최초로 손목시계를 발명했을 것이라 추측되는 또 다른 후보 브랜드는 지라드 페리고다. 지라드 페리고 또한 유럽 왕실에 시계를 납품하던 유수의 브랜드였고, 지금까지 그 기술력을 이어오고 있는 역사 깊은 브랜드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지라드 페리고가 1880년 카이저 빌헬름 1세의 주문을 받아 독일 해군 장교들을 위해 만든 시계에 주목해야 한다. 액세서리도, 회중시계에 가죽 줄을 매단 것도 아닌, 최초의 손목시계 형태를 띠고 있는 시계였다. 이 형태를 취한 이유는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꺼내는 기존의 시간 확인 방식이 병사들의 생존확률을 높이는데 효율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사들을 위해 2000개만 만들어진 이 시계는 크라운이 오른쪽에 달려있는, 확실하게 현대식 손목시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손목에 시계를 차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전투 보조가 목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최초의 손목시계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최초의 손목시계, 1904년 까르띠에의 시계

▲ 산토스 뒤몽(Santos Dumont)과 최초의 까르띠에 산토스 워치. 출처=셔터스톡

1900년대 까르띠에의 수장인 루이 까르띠에는 현대 비행의 선구자이자 그의 친구인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의 부탁을 받았다. ‘비행을 할 때 회중시계를 꺼내 시계를 보는 것이 힘들어 비행을 하는데 큰 위험이 따른다’는 고민을 들은 까르띠에는 친구를 위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시계를 선물하겠다’라는 약속을 했다. 연구를 거듭해 손목시계의 설계도를 만든 까르띠에는 프랑스의 시계 기술자 에드몬드 예거(예거 르쿨트르 공동 창립자)와 함께 3년에 걸쳐 시계를 만들게 된다. 가죽으로 된 스트랩, 줄을 쉽게 장착하기 위한 러그까지. 그야말로 손목에 착용하기 위해 개발된 최초의 손목시계였다. 뒤몽은 이 시계를 차고 1906년 유럽 비행에 성공했고, 1911년 까르띠에는 친구의 이름을 따 '산토스 드 까르띠에'라는 모델을 출시하며 시계 시장에 처음으로 지금의 손목시계와 같은 형태의 시계를 내놓게 되었다.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손목시계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식이 아니고,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손목 위에 시계를 차게 하기 위한' 이유로 만들어졌고, 실제로 시장 진입에 성공했기 까르띠에는 최초의 손목시계를 만든 브랜드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동시에 최초의 파일럿 시계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초라는 것의 의미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저마다 최초의 손목시계라 주장하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름 모를 브랜드에서 생산된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시계,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카롤린 뮈라의 브레게,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파텍필립, 군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만든 지라드 페리고,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만들어 훗날 모든 이의 손목에 올리게 된 까르띠에 산토스. 이 모든 최초의 시계들을 두고 보았을 때 역사 속에 등장한 시기 또는 결정적 기능, 혹은 그에 얽힌 스토리 중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어 평가하느냐에 따라 타이틀의 주인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따라서 최초의 손목시계라는 타이틀의 주인을 정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시계를 차고 있는 당신 자신이 되겠다. 어떤 시계를 최초의 손목시계라고 생각하는가?

▶ 지구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계 집결지 [타임피스 아시아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