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GM의 몽니에 우리 대책은 없는 걸까. 한국 GM의 철수가 현실이 될 경우 지역경제가 크게 휘청거릴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GM의 횡포에 끌려다닐 만큼 우리가 약자인가. 20년 전처럼 한국GM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노하우가 여전히 없는 것일까.

2014년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미래의 지구는 축복이 사라진 저주의 땅으로 그려졌다. 인류는 마치 병상에 누워 수동적인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을 키워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끊임없이 답을 찾아내고 찾아내 희망을 현실로 만든다. 20년 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때와는 달리,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영업이익 53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 속에 전성기가 아직 멀었다는 이견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 기업’ 삼성전자는 반도체 최강자 인텔을 뛰어넘었고, IT기업 최강자 애플과 글로벌시장에서 각축할 만큼 세계 최고기업 반열에 올라섰다. 삼성전자의 강력한 기반은 지난해 전체 영업이익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 반도체 부문이다. 이익이 35조2000억원이나 나왔다. 현재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 1위 기업인 인텔을 눌렀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는 당분간 적수가 없다.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굳건한 1위다. 조명기 IT 칼럼니스트는 “당분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능가하는 기업은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에는 삼성전자만 있는 게 아니다. 산업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등의 절차 끝에 하이닉스를 인수한 SK는 단숨에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을 3조원이상으로 끌어올렸다.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해 업체별 세계 낸드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36.7%), 도시바(17.2%), 웨스턴디지털(15.5%), SK하이닉스(11.4%), 마이크론(11.1%), 인텔(7.4%). 우리나라의 양대 반도체 기업이 전 세계 반도체 낸드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반도체 생산을 중단한다면, 하늘의 위성에서부터 지상의 모든 전자제품과 자동차, 해상의 선박들까지 일제히 멈추게 된다. ‘지구가 멈추는 날이 온다’고 할 만큼 우리 기업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어떻게 반도체산업을 이렇게 장악할 수 있었을까.

지난 1년간 감옥생활 끝에 출소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입구에서 “1년 동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장기간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는 얘기다. 그 직후 삼성전자는 또다시 신규투자를 결정하고, 공장증설에 나선다. 삼성가의 후계자답게 반도체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SK그룹 최태원 회장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지난해 4월 최순실 사건과 관련 검찰의 출국금지가 풀리자마자 최 회장은 인천공항에 나타났다. 도시바의 반도체 부문 인수를 위해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총수로서의 과감한 실천력이 집중조명을 받았다. 한국기업 특유의 제조업 중심, 생산 및 투자 중심 마인드, 과감한 결단력이 오늘날 ‘초강력’ 반도체 생산국가를 만드는 초석이 됐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의 비결을 냉정하게 분석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계 경제에 대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1974년 파산 상태에 몰린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결정에 찬성한 중역들은 없었다. 일본 전자산업 사정에 밝은 이 창업주는 부품과 소재사업의 연장선에서 반도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부상하고 있음을 통찰했다. 당시 이 창업주는 아들인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에게 한국반도체 경영의 전권을 맡겼다.

이건희 삼성회장은 반도체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조사를 마친 뒤 미국 실리콘밸리로 날아갔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막 인텔을 설립하고 래리 앨리슨이 직원 두 명과 함께 1200달러의 설립금으로 ‘꿈’을 꾸던 시절이다. 이 회장은 실리콘밸리의 기업은 물론 각 유명대학의 강의실을 돌며 인재들을 모으며 삼성전자 반도체의 밑그림을 짰다.

1983년 2월, 이건희 회장이 ‘동경선언’을 내놨다. 이제 막 전자산업에 뛰어든 삼성전자가 글로벌 D램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큰 손들은 이 회장을 ‘풋내기’ 취급했고, 얼마 가지 못해 ‘나가 떨어질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렇지만 이후의 역사는 그들의 예언과는 완전히 반대가 됐다.

1983년 12월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 기염을 토한 삼성은 10년도 채 못돼 1992년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동경선언을 비웃던 소위 ‘큰 손’들이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이 될 것이라는 탁월한 판단력과 함께 뚝심 있는 장기적 투자. 미국과 일본을 통틀어 삼성전자가 과감히 반도체 생산능력 투자에 집중할 때 삼성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큰 투자로 응전한 곳은 없었다. 나가떨어졌던 큰손들은 따라오는 듯했다가, 삼성전자의 ‘격차 벌이기’ 투자의지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고 이병철 창업주,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진 총수들의 결단력이 현재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온 핵심 요소다. 한국 기업에는 총수들의 ‘뜨거운 피’가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주목받는 이유도 사라지지 않을 ‘뜨거운 피’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려 약 1년간 구속당한 후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직후 열린 이사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삼성전자의 경영 전반을 직접 챙기는 한편 인수합병과 미래 먹거리 발굴에 혼신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이건희 회장 와병 후 경영전면에 나선 그는 화성 반도체 라인 건설을 비롯해 삼성페이의 전신인 루프페이, 전장사업체 하만 인수를 진두지휘하며 삼성전자의 새로운 도약을 주도했다. 경영전문가 정인호 컨설턴트는 “오너 일가의 지배구조는 정경유착 등 어두운 단면도 많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큰 규모의 투자를 끌어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중일 아시아 기업 중 특히 한국에 있는 특유의 경쟁력이 ‘과감한 결단력’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인 화성 라인을 가동하며 낸드플래시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 캠퍼스에서는 EUV 라인 기공식을 열어 60억달러의 투자를 단행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화성 EUV라인을 통해 향후 고성능과 저전력이 요구되는 첨단 반도체 시장 수요에 적기 대응하고, 7나노 이하 파운드리 미세공정 시장을 주도해 나갈 계획이다. 삼성전자 DS부문장 김기남 사장은 “이번 화성 EUV 신규라인 구축을 통해 화성캠퍼스는 기흥, 화성, 평택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중심이 될 것”이며, “삼성전자는 산학연 및 관련 업계와의 다양한 상생협력을 통해 국가경제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SK 최태원회장, 입술 부르트게 만들었던 염원 

SK하이닉스의 현재와 미래에서도 거의 똑같은 모습의 선견지명과 과감한 결단력을 만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세운 국도건설(주)을 전신으로 삼고 있는 SK하이닉스는 IMF위기를 겪으면서 퇴출직전으로까지 몰렸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계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이 여기서 일어난다. 2011년 11월 채권단이 매각에 나서자 SK텔레콤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다. 2012년 2월 14일 SK는 (주)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 그룹 역사상 해보지도 않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인수합병을 주도한 사람은 최태원 회장과 박정호 현 SK텔레콤 사장이다.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로 득보다 실이 크다는 그룹 최고경영진들의 만류에 최 회장은 거의 처음으로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이것만은 꼭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계열사 사장들에게 드러냈다.

그리고 SK하이닉스 인수 확정 직후 최 회장은 “밤을 지새워 반도체산업을 공부하겠다”는 말과 함께 곧장 미국 실리콘밸리를 쫓아가 전문가를 영입하러 다녔다. 그리고 6년 만인 지난해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 3조2767억원을 기록하며 SK그룹의 미래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도시바 인수전에 뛰어들어 한미일 연합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활동하기도 했다. 출국금지 조치로 글로벌 행보가 막혔던 최 회장은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자마자 지체 없이 일본으로 날아가 도시바 인수전을 진두지휘했다. 출국차 공항에 등장한 최 회장이 핼쑥한 얼굴로 입술까지 부르튼 상태에서 ‘전의’를 다지는 장면은 저돌적이고 뚝심 있는 한국 경영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 최태원 회장이 올해 초 강연을 통해 뉴 SK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출처=SK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중요… 정치권이 기업 힘 보내줘야

1990년대 말 IMF 당시 한국 경제와, 2018년의 한국 경제는 다르다. 지금 한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비롯한 핵심 전자부품 생태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외국 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며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품 경쟁력을 바탕으로 외국 기업에 역제안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애플의 아이폰X는 삼성디스플레이의 OLED 납품이 없었다면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글로벌 중소형 OLED 시장 점유율 95%를 넘기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성공 방정식이 대한민국 전체 기업의 성공 방정식일 수는 없지만,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국내 경기가 다소 좋았다고 하지만, 올해는 불확실성의 확장으로 어려운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각 기업이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힘 있는 행보를 보인다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정치인들의 부당한 간섭, 발목 잡기가 경제성장의 동력을 저해하지 않도록 하고 각 기업들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 정치권과 국민이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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