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윤선 기자] “제약업계는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유리천장’이 무너지고 있는 곳이죠.”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장녀인 임주현 전무를 제외하고는 근무 연수 8년 차로 여성 임원 중 가장 오래 근무한 박명희(48) 한미약품 마케팅팀 전무의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유리천장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여전히 막고 있다는 점에서 울림이 매우 큰 발언이다.

그는 덕성여자대학교 약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았다. 이후 바이엘코리아, 한국화이자, 한국MSD 등 굵직한 다국적제약사에서 임상시험, 영업사원 교육, 라이선스인, 마케팅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한미약품에는 2011년 입사해 회사의 전문의약품의 마케팅전략, 마케팅 실행, 영업기획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선 마케팅과 영업은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된다. 박명희 전무는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마케팅 분야를 총괄하는 임원이다. 최근 박명희 전무를 만나 여성 임원의 자리에 오른 비결을 들어봤다. 

▲ 박명희 전무.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전문성’에 ‘개방적인 회사 분위기’ 더해져 탄생한 여성 임원

‘제약바이오女波’의 첫 주인공은 박명희 전무다. 그가 첫 인물이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은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다. 국내 제약사의 여성 임원 비율이 10대 대기업 평균보다 높다고는 해도 여전히 10% 미만이고, 제약사 대부분은 아직까지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기에 그는 돋보인다.

박 전무는 또 아무런 연줄도 없이 스스로 ‘전문성’을 열심히 키워온 결과 특유의 전문성과 추진력, 적극성을 인정받아 여성 임원 자리에 올랐다. 또한 국내 제약사 중 여성 임원 비율이 가장 많은 한미약품의 개방적인 분위기도 유리천장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 전무는 인터뷰 내내 “한미약품의 사내 분위기는 다국적 제약사와 다르지 않다”면서 “그는 “창조와 도전, 열정, 혁신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는 고유한 사내 문화 덕에 유리천장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미약품그룹의 개방성은 수치에서 잘 드러난다. 한미약품그룹(한미사이언스 포함) 전체 임원 53명 중 여성 임원은 12명(23%)이다. 이는 국내 제약사의 여성 임원 평균 비율인 7%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특히 한미약품에서는 남성들이 주로 맡은 분야에서도 여성 임원이 맹활약 중이다. 박 전무는 “마케팅, 비즈니스 외에도 공장 책임자, 법무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여성 임원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면서 “본사와 연구센터는 전체 근무 인력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며 제약영업(MR) 부문에서도 최근 3년간 여성 비율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한미약품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세 번의 공채를 통해 32명의 여성 MR이 입사했는데 이는 과거 10회의 공채로 입사한 여성 MR의 인원수와 비슷한 수치다. 잇따른 리베이트 사태로 제약업계의 영업이 최근 ‘관계’ 위주에서 ‘전문성’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덕분이다.

‘도전을 즐기는 성향’에 안정적인 ‘약사’ 버리고 제약기업 입사

박 전무는 여성 임원에 오른 본인의 비결로 ‘전문성’과 ‘도전정신’을 꼽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일을 하는 것을 늘 즐기고, 한 곳에 머물러 있기보다 도전하는 성향이 전문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면서 “특히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고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래야 꾸준히 일을 지속하면서 전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박 전무는 약대 출신이지만 ‘약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두고 기업에 입사했다. 처음엔 약사로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지만 워낙 활발한 성향 덕에 다양한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 꿈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지인의 소개로 제약업계에 발을 들였고 MBA를 취득하면서 마케팅에 재미를 느꼈다.

박 전무는 “약사라는 직업이 안정적이긴 하지만 일을 할 당시 답답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면서 “이때 마케팅을 전공하면서 재미를 느끼면서 제약 마케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제약사에 소속돼 전문의약품을 판매하려면 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약사 출신인 것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여성, 가사 부담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말아야”

국내에선 결혼 후 직장에서 퇴사하거나 잘려 경력이 중단된 ‘경력단절여성’을 줄인 말인 ‘경단녀’가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결혼이란 직장을 다니는 여성에게는 큰 ‘위협’이 된다. 박 전무는 가족들의 도움과 회사의 정책으로 자기 일에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었다.

박 전무는 “회사에서 육아휴직 등 관련 정책이 잘 마련돼 있고, 가족들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을 이해해주고 도움을 줬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아를 하는 여성이지만, 남자와 똑같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고 주말에도 행사가 많았지만 쉬지는 않았다”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여성이 임원에 오르기 힘든 이유는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를 맞추기 힘들다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박 전무는 “아직도 여성은 일뿐 아니라 가사도 잘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서 여성들 스스로 그런 분위기에 치어 자기 일을 포기하는 것 같다”면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육아를 남편과 동등하게 나누거나 일을 그만두지 않고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적극 찾아봐야 한다”면서 “혼자 힘든 일을 다 짊어지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인의 마음가짐도 일을 그냥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여기면 단기,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박명희 전무.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후배들의 제약업계 진입? ‘강력 추천’하고 싶다”

박 전무는 가끔 모교를 찾아 강연을 한다. 그는 그 어느 역량보다 ‘전문성’이 중요한 업계 특성상 여성들이 진입한 후 자기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업계에 들어오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거듭 강조하지만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는 ‘전문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서 “특히 업계 내에서도 여러 분야와 세부 직무가 있으니 그중 자기의 강점을 잘 발휘할 수 있고 좋아하는 분야를 찾은 후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전무는 “여성 특유의 ‘소통’ 능력이나 ‘부드러움’만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전문성에 더불어 과감한 결단, 추진력 등을 발휘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지, 성별을 의식하고 ‘여성성’에 기대 무언가 성취해보려는 자세는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꿈 외에 박 전무의 개인 소망은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여성 임원으로서 여성 후배들한테 롤모델이 되고 싶다”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후배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