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정경진 기자]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요즘, 일부 기업들이 고용을 세습하는 규정을 두고 특혜 논란이 일고 있다. ‘현대판 음서제’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2015년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하는 게 옳을 정도다. 정부가 1월 29일 공공기관 채용 비리 특별점검을 벌인 결과, 점검 대상 1190곳의 공공기관 중 80%에 해당하는 946곳에서 4788건의 비리가 적발됐다.

이보다 앞서 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고액연봉과 복지혜택으로 취업준비생들에게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강원랜드가 지난 2013년 518명의 합격자 가운데 95%에 해당하는 493명을 청탁을 통해 입사시킨 ‘블록버스터급’ 채용 비리 사건이 드러났다.

채용 청탁을 한 사람 중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보조관, 공공기관 기관장 등 고위공무원 여러 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 비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두 번 은행권 채용 비리 점검에 나서 KEB하나은행, KB국민은행, DGB대구은행, BNK부산은행, 광주은행 등 5개 시중은행에 대한 총 22건의 채용 비리 정황을 포착했다.

‘현대판 음서제도’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음을 이제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음서제도는 고려시대 문벌 귀족에게 준 정치 특권으로, 고려시대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무시험으로 관리가 되도록 한 제도다. 조상의 음덕을 통해 자제가 혜택을 보는 제도로 공음전 제도와 함께 고려 문벌귀족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결국 고려사회를 병들게 한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자그마치 천여년 전 시대에 존재했던 제도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돈도 실력이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 원망해”

2015년 이화여자대학교에 부정 입학한 정유라가 자기 SNS에 올린 이 한 마디는 한국 사회를 이른바 ‘멘붕’에 빠뜨렸다.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전말을 드러내게 한 이 말 한 마디는 ‘부모의 능력 = 자녀의 능력’임을 함축한다.

‘부의 대물림’은 결국 ‘계층’을 고착화한다. 금수저는 영원히 금수저, 흙수저는 자자손손 흙수저로 생을 마감하도록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소득의 불평등이 심하더라도 사회 내에서 이동성이 충분하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그의 말은 한국 사회는 통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계층이동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로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총 8차례 벌인 ‘사회조사’ 항목에는 ‘자녀 세대의 계층이 높아질 가능성’을 묻는 게 있다. 다시 말해 자녀 세대가 부모세대보다 더 나은 직업을 가질 가능성을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낙관하는 비율은 1999년 65%에서 2017년 31%로 급락했다. 반대로 비관하는 비율은 18%에서 54%로 치솟았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사회적 이동성은 불가능하며 부의 대물림으로 계층이 고착화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대 논문은 이런 해석을 증명한다. 서울대 경제학부 주병기 교수와 박사 과정 오성재 씨가 쓴 ‘한국의 소득기회불평등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 따르면, 개인의 소득은 노력뿐만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학력 등 사회경제적 환경, 선천의 재능, 우연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논문은 자체 개발한 개천용불평등지수도 분석했다. 이 지수가 1이면 최상위 소득을 얻는 사람 중 최하위 환경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기회 불평등이 가장 높다는 의미다. 조사 결과 이 지수는 조사기간 꾸준히 상승했다.

가구주 부친의 직업환경을 분석한 결과 기회불평등도는 2001년 10%대에서 2014년 40% 가까이 증가했다. 2016년 한 금융권 신입사원 중 채용특혜를 받은 일부가 국정원, 금융감독원, VIP고객 등의 자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더 높을 수 있을 것이란 예측도 있다.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워졌다’는 시쳇말은 연구 결과에서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그만큼 ‘수저’(주어진 환경)가 주요한 요인이 됐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역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심해졌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제윤경 의원이 한국은행의 ‘2016대차대조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피케티 지수(전체 자산가치를 국민소득으로 나눈 값)가 8.28배로 세계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일본(6.01배), 프랑스(5.75배), 영국(5.22배), 미국(4.10배), 독일(4.12배)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불평등 정도가 훨씬 높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그의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초고소득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러 통화 정책, 예산 정책 등 정부의 각종 정책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평등의 심화는 불공정을 초래하고, 이것이 다시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약탈 불평등’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공기관과 금융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채용 비리에 고소득층과 권력층은 물론 서민층까지 연줄을 동원해 편승하려고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약탈불평등의 악순환을 용납할 정도로 도덕이 마비된 사회임을 웅변한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향기로운 술잔을 들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유전할 때 계층 상승을 꿈꾸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흙수저, 저소득층은 촛물 같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도덕불감증에 걸린 한국의 생생한 민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