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갑오개혁(甲午改革)은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94년(고종 31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약 1년 7개월 동안 총 3차로 추진된 조선의 개혁운동이다. 역사가들은 갑오개혁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 간섭을 시작하는 계기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온갖 병폐로 물든 조선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갑오개혁의 기본 내용은 124년이 지난 현재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준다.

갑오개혁 정신 ‘차별 금지’ 원칙

갑오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차별의 금지였다. 특정 집안의 신분이나 지위를 보장해주는 ‘문벌(文閥)’과 백성을 양반과 평민 등 신분으로 차별했던 반상제도(班常制度)를 폐지했다. 아울러, 나라나 개인이 사람을 노예로 사유할 수 없도록 노비법(奴婢法)을 폐지하고, 일부 직종을 천민(賤民)으로 낙인찍는 구분도 없앴다. 일련의 개혁에는 출신 성분이나 직업, 집안 등 개인 역량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들이 차별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반영돼 있다. 124년 전 우리 조상들이 국가 개혁으로 보여준 차별 금지의 원칙은 최근 불거진 대기업들의 채용비리 문제를 대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최근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공기관과 대기업, 은행 등의 채용 비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구직 지원자들의 출신 학교 혹은 인맥을 개인 역량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차별한다는 점이다. 이런 차별을 기반으로 한 ‘채용적폐’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일부 기업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도입하고 있는 블라인드 채용을, 한계가 있더라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대졸 취업자 24.2% “취업에 인맥 활용”

한국고용정보원(이하 고용정보원)이 전문대학,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상태(2016년 9월 기준)에 있는 37만6961명의 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발표한 <2016년 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 기초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일자리를 얻는 데 ‘인맥’을 활용한 취업 준비생들은 전체 사례에서 28.5%의 비중을 차지했다. 거의 셋 중 한 명 꼴이다.

이 중에서는 가족·친척 등 지인 추천이 5만751명(13.5%)으로 가장 많았고, 학교 등 교육기관 소개가 4만297명(10.7%)으로 그 뒤를 이었다. 구직을 원하는 기업 근무자의 소개를 활용한다는 구직자도 1만6366명(4.3%)이 있었다.

이는 인력 수요를 홍보할 여유나 비용이 충분하지 않은 중소기업들에게는 ‘관행’처럼 여겨진 인력 수급 방법이다. 인맥을 통한 추천이 있으면 구직 대상자의 장점이나 특성을 파악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꽤 선호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서울 성북구에서 의류 도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노인규(61) 씨는 “하루가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 가운데 시간을 따로 내 구직을 홍보할 여유가 없어 직원이 필요할 때 주변 사람의 추천이나 소개를 받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길어지고 청년 실업률이 두 자릿수에 이르는 취업 한파가 계속되면서 인맥 취업은 사회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인맥 취업은 특히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며 오랜 시간 취업을 위해 준비해온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자기들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인맥이나 학력을 개인 역량보다 우선해 기회 균등의 원칙을 깬 일부 대기업들의 채용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또 다른 ‘갑질’과 같다”면서 “현행법으로는 정부가 개별 기업의 채용을 제재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공공기관이나 금융회사의 채용 비리를 방치해 민간기업들의 불공정 채용이 늘어나면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 교수는 “사안의 심각함을 인식해 정부는 일련의 피해 사례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속히 관련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대경제연구원 홍준표 연구원은 “개별 구직자들의 실력이 아닌 인맥이나 추천을 통한 채용을 당연시하는 기업들의 관행은 나아가 청년들의 경제 활동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역량 중심’ 채용 위한 기업들의 아이디어

학연이나 지연 등 외적 요소로 응시자를 평가하고 채용하는 기업의 채용방식이 ‘불공정 행위’라는 질책의 목소리가 높은 지는 오래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역량만으로 지원자들을 평가하는 다양한 ‘블라인드(Blind)’ 채용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하고 있어 현재의 채용시장이 개선될 여지는 있다고 하겠다.

롯데그룹은 지난 2015년부터 지원자의 순수 직무 수행 역량을 평가해 직원을 채용하는 ‘스펙태클(Spec-Tackle) 채용’을 하고 있다. 스팩태클은 ‘화려한 볼거리’를 의미하는 영단어 스펙타클(Spectacle)과 취업 준비생들이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 경쟁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다’는 의미로 붙인 영단어 태클(Tackle)의 합성어다.

▲ 롯데의 블라인드 채용 '스펙태클' 출처= 롯데그룹

스팩태클 채용의 서류전형에서 롯데의 인사담당자는 지원자의 이름이나 학교 등 개인 정보를 보지 않는다. 오로지 롯데 각 직군별로 제시한 과제를 해결한 결과물로만 지원자를 평가한다. 지원자가 자기의 학력이나 스펙을 연상할 수 있는 내용을 제출 과제에 기재하면 이는 감점 요인이다. 2단계인 면접전형도 각 직무별 특성을 반영한 주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발표나 미션수행 방식으로 이뤄진다. 채용의 모든 일정에서 지원자의 학력이나 배경을 묻는 과정은 없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2014년부터 면접관들이 지원자의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주제 발표(프레젠테이션)로 지원자들의 업무 역량을 파악하는 블라인드 면접을 채용에 적용하고 있다.

CJ그룹도 지난해 하반기 공개채용부터 블라인드 방식 채용인 ‘리스펙트 전형’을 도입했다. 지원자의 경험과 역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리스펙트(Respect)’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스펙트 전형은 입사지원서에 출신학교, 학점, 어학점수 등 스펙정보 기재란을 아예 없앴다.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계열사별 업무 특성을 반영한 수행 과제를 내고 지원자들이 이를 해결하는 역량을 평가한다.

이 같은 블라인드 채용은 기업의 이미지 개선과 신선한 아이디어와 업무 역량을 갖춘 인력의 확보 등 여러 장점이 있다. 국내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블라인드 채용으로 선발된 직원들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직군에 배치되기 때문에 업무 만족도가 대체로 높은 편”이라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많이 내 회사의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고 말했다.

미완의 대안, 블라인드 채용

공정 채용의 대안으로 블라인드 채용이 떠오르면서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만, 공정성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블라인드 채용은 미완성의 제도인 것이다. 기업이 업무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은 블라인드 채용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힌다. 명확한 평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은 어떤 방법으로 입사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오히려 헷갈려 하는 경우도 많다.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 오규진(29세) 씨는 “많은 시간을 들여 학위를 쌓고 어학 점수를 높이는 등 취업을 위한 스펙을 준비해 왔는데 막상 기업들이 갑자기 이전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신입사원들을 뽑기 시작하면서 애써 준비한 스펙을 활용할 수 없게 됐다”면서 “열심히 스펙을 준비해온 취업 준비생들에게 블라인드 채용은 다른 의미로 ‘역차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채용을 담당하는 인사 담당자들의 불만도 있다. 한 대기업의 임사 담당자는 “스펙으로 지원자들의 모든 역량을 파악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지원자의 기본 소양은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본 정보 없이 채용을 하려니 시간도 많이 들고, 내부에서도 평가에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어 난감할 때가 많다”면서 “불합격을 납득하지 못하는 지원자들의 항의성 메일이나 전화도 늘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블라인드 채용의 단점 보완이 시급한 이유다. 현대경제연구원 오준범 선임연구원은 “기회 균등을 위한 대안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선택한 취지는 좋지만 평가 기준의 불확실성 등 여러 요소들은 성실하게 스펙을 준비해 온 취업 준비생들에게 역차별 소지가 있다”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은 서류 전형에서 학벌이나 연고를 제외한 스펙을 반영하고, 면접 단계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로 지원자를 평가하는 등 다양한 보완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역량’ 평가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한국고용정보원 박진희 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적폐’ 중 하나인 학벌주의에서 벗어나 기회 균등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는 바람직하다고 본다”라면서 “문제는 각 기업의 블라인드 채용이 지원자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두지 않고 일단 논란이 되니 학력 스펙부터 가리고 보는데 이는 옳지 않다”라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특히 요즘과 같은 취업난에 기업들은 구직자들의 역량을 제대로 측정해 채용에 반영할 수 있고 동시에 구직자들도 납득할 수 있는 ‘도구(툴)’를 마련해 구직의 차별 요소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