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런 와중에 광주목사 권율도 당시에 문무를 갖춘 인재라 하여 이순신, 곽재우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던 사람으로 조정의 장수 천거에 들었습니다.”

“당시에 동북현감 황진으로 선봉을 삼아 진산의 이현을 지키게 하였는데, 전 통신사 황윤길의 종자였던 황진의 자는 명보(明甫)였고, 키가 크고 좋은 몸을 가진 의기 있는 선비다. 그는 숙부 윤길을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장차 일본이 큰 난리를 일으킬 것을 짐작하고 일본의 명검 두 자루를 사가지고 나온 선비로서 무예와 용맹함이 천하의 역사였다.”

“네, 일본군이 전라도를 침략하려고 이현을 쳐들어올 때 황진의 군사가 나무로 적의 탄환을 막아내고 화살로 적을 쓰러뜨리는 전투를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이 패하여 피를 흘리는 피가 초목을 물들이며 퇴각하려고 할 때, 황진은 군사를 독려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자 아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적이 알아채고 다시 쳐들어왔으나 권율이 수하 장수들과 군사들을 독려하여 맹렬히 싸우는 틈에 황진은 상처를 싸매고 일어나 적군의 수급 수백을 베어내자 삼군의 용기가 하늘을 찌르듯이 충천하자 적은 대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이현의 승리로 권율과 황진은 군의 위엄을 크게 일으켰고, 조정에서 권율을 전라 감사를 시키고, 황진은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다.”

“네, 임진왜란의 처참한 패배로 인하여 수많은 백성이 억울하게 죽어나가고 의기 있는 장수들과 병사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고 있을 때 조정의 간신배들과 선조는 명나라에서 구원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때 4만의 군사가 압록강을 넘어옵니다.”

 

4만의 명나라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다.

“壬辰년 섣달(壬子월)에 명나라는 조선 사절 정곤수의 급한 보고로 인하여 병부우시랑 송응창(宋應唱)으로 경략사를 삼고, 병부원외랑 유황상(劉黃裳)과 주사 원황(袁黃)으로 찬획군무를 삼고, 요동제독 이여송(李如松)으로 총대장을 삼아 삼영장 이여백(李如栢), 장세작(張世爵), 양원(楊元)과 남군 장수 낙상지(駱裳志), 오유충(吳惟忠), 왕필적(王必迪) 등을 부하로 하여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상세한 군개의 수는 다음과 같다.”

총대장 요동제독 이여송(李如松) 수병(手兵) 500명

중협대장 부총관 이여백(李如栢) 친병(親兵) 1,500명

좌협대장 부총관 양원(楊元) 친병(親兵) 1,500명

우협대장 도지휘 장세작(張世爵) 친병(親兵) 1,500명

이상 합계 5,000명

 

총령 임자강(任自强) 선부병(宣府兵) 1,000명

삼장 이방춘(李芳春) 기마병 (馬兵) 1,000명

유격장군 (高策) 기마병 2,000명

총령 전세정(錢世貞) 기마병 1,000명

유격장군 척금(戚金) 보병(步兵) 1,000명

중영장 주홍모(周弘謨) 보병 1,000명

유격장군 방시휘(方時輝) 기마병 1,000명

유격장군 왕문(王問) 기마병 1,000명

이상 아홉 장수 기마병과 보병 합계 10,000명 이여송이 통솔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기마병 1,200명

부총병 왕유정(王維貞) 기마병 1,000명

참장 이여매(李如梅) 기마병 1,000명

참장 이여오(李如梧) 기마병 500명

참장 양소선(楊紹先) 기마병 1,000명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기마병 1,000명

유격장군 갈봉하(葛逢夏) 기마병 2,000명

이상 일곱 장수의 기마병과 보병 합계 7,700명 원왕부총관

조승훈이 통솔

 

유격장군 오유충(吳維忠) 보병 1,500명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南兵 1,000명

참장 조지목(趙之牧) 기마병 1,000명

참장 장응충(張應冲) 기마병 1,500명

참장 진방철(陳邦哲) 보병 1,000명

유격장군 곡 수(谷 燧) 기마병 1,000명

유격장군 양 심(梁 心) 기마병 1,000명

이상 일곱 장수 기마병과 보병 합계 8,000명 장세작이 통솔

 

이밖에도 문무장수와 관리가 많았고 유격장 왕수신(王守臣), 사대수(査大受)와 부총병 수양정(修養正), 낙상지(絡尙志)와 참장 장기공(張奇功) 등의 기마병이 각 1,000명 그 밖에

 

유격대장 조문명(趙文命) 기마병 1,000명

유격대장 고 철(高 徹) 기마병 1,000명

동지 이 평(李 平) 기마병 800명

유격장군 시조경(施朝卿) 기마병 1,000명

이상 네 장수의 기마병 합계 3,800명

“네, 요동 지휘사 장삼외(張三畏)는 군량을 감독하였고, 심유경도 뒤따라 와서 의주성 안에서 대장 이여송과 무슨 밀담을 하고 한걸음 앞서서 평양을 향하여 나아가고 이여송의 대군이 안주에 이르렀을 때에 유성룡은 접대관으로 이여송에게 면회를 청하였습니다.”

“음! 이여송은 유성룡을 가까이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심유경가 같이 오만무례하지는 않았다.”

“네, 유성룡이 먼 길을 온 수고로움을 위문한 뒤에 소매 속에 있던 평양지도를 내놓고 형세를 가리키며 어디로 쳐들어가야 할 것인지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여송은 유성룡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붉은 글씨로 가르치는 곳에 붉은 점을 치고, 유성룡을 안심시키는 듯이

‘염려할 것 없소! 적은 조총을 믿지만 우리는 대포가 있어서 대포로 쏘면 5, 6리를 가지 적이 당하겠느냐!’

하고 아주 염려할 것이 없다는 듯이 웃으며 유성룡과 헤어질 때 이여송은 부채를 내어 시 한 수를 지어 써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군사와 함께 밤에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조선 땅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께서 늘 마음속에 두고 계신 뜻 나 또한 즐기던 술도 그만두었다.

살기를 띠고 왔건만 마음은 오히려 장해지고 이제 왜적들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라 어찌 말이라도 하더라도 이기지 못한다 하리요 꿈속에서 말 위에서 싸움을 생각한다.

 

이튿날 이여송은 부총병 사대수를 먼저 순안으로 보내니, 사대수는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에게 사자를 보내어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화평을 허락하였다’

라는 글을 전하였다.”

“네, 이미 명나라에서 화친을 이미 허락한다는 뜻인데, 심유경은 이렇게 화친을 허락하게까지 한 것이 자기의 공인 듯이 소성행장에게 심유경이 왔다는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환영하던 고니시 유끼나가도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던 터라 심유경이 순안에 왔다는 말을 듣고 부하 평호관(平好官=고니시의 휘하에서 평호관의 직책에 있었던 장수 죽내길병위竹內吉兵衛-다케노우치 기치베를 지칭한다.)으로 하여금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영접사로 보낼 때에 중국의 문화를 칭송하는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다. 그 시는

 

싸움을 끝내고 중화를 복속시키니 온 세상이 한 가족이 되었구나.

기쁜 기운이 문득 바깥눈까지 녹이니 봄은 아직 이르건만 태평한 꽃이 피었구나.

 

라는 시를 주었다. 사대수는 평호관을 거짓으로 환영하는 척하고 술을 많이 먹여 취하게 한 뒤에 장막 뒤에 매복시킨 군사로 하여금 평호관의 군사를 다 잡아 죽이게 하고 평호관도 사로잡아 행장의 군사비밀을 말하라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으나 다케노우치 기치베의 군사 몇 명이 도륙을 면하고 도망하여 평양에 돌아와 평호관이 명나라 군사에게 잡혀 죽은 것을 고하였다.”

“하하! 비록 1592년에 일어난 일이지만 고소합니다. 고니시는 심유경의 간사한 흉계에 넘어간 것을 깨닫고 분노하면서도 명나라 군사가 크게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곧 성을 지킬 준비를 행하였습니다.”

“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없이 적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린 명나라 대군은 빠르게 숙천에 다다라 순안에서 평호관을 죽이고 그가 거느린 군사 몇 명이 평양으로 도망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제독 이여송은 일각을 지체할 수 없다하여 화살을 당기어 줄을 울리는 진군신호를 보내고, 이여송은 곧 바로 말에 올라 여러 기마병을 데리고 순안으로 달려갔고 막하 여러 진영도 뒤를 이어 숙천을 떠나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침에 평양성을 에워싸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쳐들어 간 날이 양력 1593년 2월 6일, 음력癸巳년 정월 초 6일(癸巳년, 甲寅월, 辛酉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