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내전> 김웅 지음, 부키 펴냄

 

저자는 자신을 ‘생활형 검사’라고 자처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직장생활’ 18년 차 현직 검사가 쓴 ‘재밌는 검찰체험기’ 쯤으로 이해되고 있다. 몇몇 관련 서평에서도 책 속 검사는 현직 대통령과 세계적 재벌 총수를 잡아들이며 거악에 맞서는 서슬퍼런 법집행자가 아니라 샐러리맨 이웃처럼 친근해 보인다.

하지만 183쪽에 이르면 선입견이 깨진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루틴한 업무를 반복하는 ‘단순 생활형’이 아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하여, 겉으로는 미담이지만 안으로는 피해자의 피눈물로 그득한 숱한 새드엔딩의 현장들에 대하여 검사로서 분노하고 있다. 그 일부를 요약해 옮긴다. 일독을 권한다.

‘2011년 12월, 대구에서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던 중학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이의 마지막 시간은 CCTV에 남았다. 세상 끝으로 가는 승강기 안에서 섧게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검사인 내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 소름 끼치도록 슬픈 영상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학교폭력의 원인을 경쟁이나 입시 같은 사회적 요인 탓으로 돌리고, 피해자의 잘못으로 모는 것은 비과학적인 무지의 소산이다. 청소년범죄 원인에 대한 유력이론인 ‘범죄의 일반이론’에 따르면, 범죄나 일탈행위는 자아통제를 못해 발생한다. 부모나 보호자가 자녀의 행위를 주의 깊게 ‘감독’하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해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어른들이 보인 행태 때문이다. 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화해와 용서를 강요한다. 그러고는 조용히 피해자가 전학 가는 것으로 해결된다. 학교도 사회도 인권전문가들도 모두 그것을 원한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폭력과 잘못에 대하여 침묵하는 생존법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 남을 괴롭히지 않으면 언제 그 먹이사슬의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가장 약하고 낮은 학생들을 경쟁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아이는 죽기 전에 이미 여러 차례 신호를 보내며 그 사실을 드러냈을 것이다. 수없이 신호를 보내고 아우성을 쳐도 무신경한 절벽 앞에서 아이는 절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학교폭력 관련 회의에서 한 소년 사건 전담 판사가 “이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안아준 적이 있느냐”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은 재판을 하고 나서 소년범들을 꼭 안아준다고 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꽤나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그러나 추악했고 황량했다. 내가 만난 학교폭력 가해자들 중에 ‘프리허그’로 교화될 수 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수사기관이나 재판정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반성문을 쓰고서도 자기들끼리는 신고한 아이를 어떻게 괴롭힐까 공모하는 모습을 적잖게 봤다. 그 판사의 포옹이 만약 가해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그건 무섭고 힘든 수감 생활이 끝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가해자 처벌이 비교육적 처사라거나 폭력학생의 징계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남기는 것은 인권 침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폭력을 벗어나지 못해 차가운 아파트 옥상까지 몰리게 된 아이들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남은 화인을 결코 보지 못하는 감각장애자이자 피해자들의 아픔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공감장애자이다. 범죄의 일반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범죄를 배양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 전담 검사를 하면서 나는 늘 피해자들에게 “너는 소중하고 무엇보다 존엄하다. 가해자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화해하거나 용서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대개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존엄함과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존엄한 것은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