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그저 나르시시즘으로 사랑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졌다. 유학을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는 말과 행동이 진심으로 일치하는 덕(德)을 가장 중요시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의 마음이 바탕이 되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즉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식대로의 사랑을 하면 자칫 폭력과 폭행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 부모와 자식, 연인, 부부 간에도 비극적 헤어짐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랑이란 자기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도 진심이 서로 통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랑했다’, 또는 ‘사랑을 주었다’고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괴로웠다’ 또는 ‘부담스러웠다’거나 ‘나는 싫었는데 상대가 사랑한다고 했을 뿐이다’라고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경우는 잘못된 일방적인 ‘짝사랑’ 혹은 ‘자기감정의 소모’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부 간에도, 자식에게도 사랑의 왜곡이 집착이 되고 상대방은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사랑한다면 좋은 언어와 좋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부부가 서로 자꾸 비난한다든지 자식에게 매일 잔소리를 한다면, 부부는 서로 멀어지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우리는 틀림없이 상대방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관심’이자 ‘배려’다. 자기에게도 관심이 없으면 자기가 그냥 싫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거나, 거울을 보며 못생겼다고 혐오스럽게 쳐다보거나,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며 자기를 부정한다. 이런 이렇게 자기를 왜곡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도 볼 수 있는 인간적인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진심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태음인은 자주 말이 씨가 된다고 믿고 ‘자기 충족적 예언’에 의존하려 한다. 말이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예언을 의미한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믿으면 정말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너무 믿는다.

예로 애인이 돈이 없으면 데이트 비용을 대주며 ‘저 친구 돈 없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고 믿고, 정말 헤어진 뒤 결국 돈이 그 이유였다고 믿는다. 그런데 돈도 관심이고 사랑이라고 긍정적으로 두면 되는데, 거짓 사랑이라고 믿으니 예언대로 깨진다. 따라서 미리 확신하지 말고 상대방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보며 상대방의 의지를 믿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소음인은 진솔한 사랑보다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 너무 작아 상대를 의심하며, 진심을 떠보기 위한 ‘자기 부정적 예언’을 자주 한다. 예로 자기가 진정으로 바라지도 않으면서, 또한 상대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키스를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결국 상대는 사랑하지만 그런 요구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선다. 이런 부정적 예단을 진실의 시금석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소양인은 상대방에게 자기가 이루고 싶은 내용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상대방이 그대로 변화하기를 요구하는 ‘자기이행적 예언’을 줄여야 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운동기구를 선물했다면 그건 남편이 좀 더 강해질 걸 요청하는 것이고, 반대로 남편이 아내에게 섹시한 속옷을 선물했다면, 그건 아내가 좀 더 섹시해질 걸 요청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즉 타인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기대하며 기대에 부응하는 미끼를 먼저 던진다는 것이다. 즉 현재 직무에 대해 흥미를 갖고 성취욕과 자긍심을 갖게 하여 동기부여를 유발하게 하려는 욕심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사랑을 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의 진심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해달라고만 하지 자기가 먼저 줄 생각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강요라는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