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진주로 쳐들어 올 때에 곤양 군수 이광악과 1만여 명의 군사를 합하여 성의 해자를 지키고 진주병사 유승인은 1천의 기병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돌아와 성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것을 병사가 성 안에 들어오면 주장이 바뀌게 되어 군사들의 마음이 동요될 것을 우려하여 문을 열어주지 않고 거절하니 병사 유승인은 홀로 말을 타고 사천을 향하여 달아나 사천현감 정득열과 합세하여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음! 군 지휘관들의 협력에 문제가 많았네, 나라가 위급존망인데..., 김시민 장군은 처음 병사를 일으킬 때부터 염초(焰硝=옛날 진흙에서 구워내던 화약의 원료, 지금의 초석을 말함) 수천 근을 구워 화약을 만들고 일본의 조총을 모방한 조총 70여 자루를 만들었으며 기타 현자포, 질려포, 진천뢰 등 뛰어나고 유익한 병기를 만들었다.”

“네, 적병이 성을 에워싸고 밤낮 10여 일을 맹렬히 싸웠으나 김시민 장군은 엄한 군령으로 화살과 탄알을 헛되이 쏘지 못하게 하고 밤이면 네 곳의 성의 문루에 호적(胡笛=나무로 만든 관에 여덟 구멍을 뚫고 아래 끝에는 깔때기골로 된 놋쇠를 대고 부리에는 갈대로 만든 혀를 끼워 부는 우리나라 악기 일명 날라리)을 불어 한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음! 김시민 장군의 여유 있는 전투태세가 마음에 든다. 의병장 김면, 최강, 이달의 무리와 적이 생각지 못하게 성문을 열고 나가 엄습하여 적을 대파하였는데 적의 2만여 명이 절반가량 죽었고 적의 일곱 장수도 겨우 살아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김시민 장군도 적의 철환에 중상을 입어 김해부사 서예원을 임시 목사로 정하여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고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네, 한편 일본의 나고야 대본영에서 히데요시가 진주의 패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너희들 일곱 장수가 일본의 국가의 위엄을 손상함이 적지 않다.’

고 크게 꾸짖었습니다. 장곡천수일은 진중에서 분에 못 이겨 죽고 그 나머지 여섯 장수도 심히 부끄러워하였습니다.”

 

11)초토사 이정암의 연안성 승리

“이조참의 이정암이 초토사(招討使=조선시대 변란이 일어난 지방에 파견한 임시 무관직)가 되어 연안성을 지키고 있을 때, 일본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처음 황해도에 들어가 연안을 점령하려고 쳐들어 왔으나 성의 견고함이 부원수 신각장군이 연안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성을 수리하여 견고하기가 비할 바 없었고, 또한 초토사 이정암은 군사들에게 나라의 일에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불화살을 쏘아 방어하기를 3일 동안 계속 싸우던 중에 성이 위태해지자 이정암이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올라가 누워 군사들에게 불을 질러달라고 하였는데, 마침 동남풍이 일어났다. 부장 조신옥의 무리가 달려와 나무 단에 불을 질러 성 밖으로 던지니 성에 개미떼같이 붙어 올라오던 적병이 화공에 놀라 패퇴하였다.”

“네, 그 후 나가마사는 해주와 평산에 주둔했던 군사를 끌고 와서 5일 동안 계속하여 맹렬히 싸웠으나 아군이 응전을 잘해 적군은 패하여 이로부터 연안성을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에 용감한 장수가 그리 많지 않음에 이정암과 같은 관료가 있었으니 현재나 미래에 관료들은 참고삼아야 할 것이다.

“네, 그리고 조선의 승군을 최초로 일으킨 평안도의 서산대사 최휴정은 임금의 대가가 영변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을 때에 선조가 묘향산에 있는 최휴정을 불러 16종 도총섭을 제수하여 조선 팔도에 승군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음! 못난 선조가 승군을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보다.”

“네, 승군들은 서산대사의 지휘로 승려 처영은 전라도에서 승려 유정은 강원도에서 승군을 일으켰고, 통제는 휴정이 하였으며 거의 모두가 휴정의 제자였습니다.”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은 휘하에 이미 승군을 두었는데, 숫자는 400여 명에 달하였다. 승군 모두는 장군의 충의와 용맹함에 감동되어 진실로 따르는 승군들이었으며 전라도로 들어오는 육로의 요처에 복병케 하였으며, 직책을 보면 순천 승려 삼혜는 표호별부장, 흥양 승려 의능은 유격별도장, 광양 승려 성휘는 우돌결장, 광주 승려 신해는 좌돌격장, 곡성 승려 지원은 양병용격장의 명칭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