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과거의 골드러시 시절과 다를 바가 없어요. 돈 버는 사람들은 일부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높아지는 인구와 교통체증, 물가에 시달린다고요.”

최근 샌프란시스코 방문에서 뉴욕보다 샌프란시스코가 더 비싼 도시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에 택시 기사는 작정이나 한 듯이 불만을 쏟아냈다.

“골드러시 때도 황금을 실제로 찾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어요. 황금을 발견한 사람들은 돈을 엄청 벌었지만 그 지역에서 살던 원주민들은 오히려 금을 찾는 사람들 때문에 자기들 구역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고요.”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1849년부터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중남미, 하와이, 중국 등지에서 약 30만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왔다.

1846년 불과 200명의 주민들이 살던 샌프란시스코는 6년 만인 1852년 인구가 3만6000명으로 180배가 증가했다. 1870년에는 인구가 무려 15만명으로 늘어났다.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단기간에 증가해서 1850년 9월 정식으로 미국의 한 주가 됐다. 이처럼 영토(Territory)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State)로 승인된 예는 미국 역사상 드물었다.

금을 찾기 위해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금은 찾기가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은 계곡을 따라 들어가게 됐다.

깊은 계곡이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이 사냥이나 낚시를 하고 음식을 숨겨두는 곳이었다. 골드러시를 쫓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를 마구 침범하자 원주민은 이들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총으로 무장한 금 광부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거주지에서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대학생들에게 월급을 수만달러를 제시하기도 한다고요. 대학생들에게는 정말 잘된 일이고 좋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도 없고 오히려 집값만 올라서 정말 힘들어요.”

골드러시 당시 가장 돈을 많이 번 것은 금을 찾은 광부들이 아니라 금을 채굴하는 기구들을 팔던 상인들이었다. 소수의 금 광부들은 큰돈을 벌고 대다수는 처음 캘리포니아를 찾을 때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늘어난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골드러시 초기에 가장 부유한 인물로 꼽히는 사무엘 배넌은 강가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로 상점을 차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을 채굴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몽땅 사들였다.

사들인 장비는 높은 이윤을 붙여서 광부들에게 되팔았고 이 과정에서 그는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이 택시 기사가 하소연하는 것은 바로 실리콘밸리라는 금광으로 혜택을 얻는 광부들이 아니라, 이들에게 높은 가격에 집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부동산 관련업체들에 대한 불만이다.

부동산 임대 사이트 ‘아파트먼트 리스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임차인들 중에 4분의 1 이상이 봉급의 절반을 임대료로 내면서 허덕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샌프란시스코 거주자들의 절반 이상이 주택 임대료로 자신들의 봉급의 30% 이상을 내고 있어서 경제적 부담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UCLA의 연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지역 거주자들의 80%까지가 연봉이 5만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반면 원룸아파트의 월세는 2000달러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더 먼 지역으로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만난 옆 자리 승객은 “실리콘밸리에서 유입되는 부의 효과가 샌프란시스코에 긍정적으로 미치지 않는다”면서 “실리콘밸리의 젊은 부자들만을 타깃으로 해서 샌프란시스코는 문화시설이나 예술공간을 늘리기보다는 이들에게 팔거나 임대할 비싼 아파트나 주택 건설에만 급급하다”고 질책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30년을 살았다면서 “똑같이 비싼 도시지만 뉴욕은 다양한 문화 공간이 여전히 있고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이 많은 반면, 샌프란시스코는 부자들만을 위한 부동산 투자지역으로 변모하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