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A라는 가상의 상품이 세상에 나왔다. A는 실체도 없고 손에 잡을 수도 없지만 A를 사고싶어하는 사람과 팔고 싶어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A를 좀 더 쉽게 사고팔기 위해 거래소가 생겼다. 거래소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일종의 중개를 담당해 거래를 돕고, 이들은 거래소에 가입해 계좌를 받고 현금을 매개로 A를 거래했다. 거래소는 그 사이에서 수수료를 챙겨 수익을 얻었고 A를 거래하는 시장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코노믹리뷰=허지은 기자] 가상통화(가상화폐)만의 얘기는 아니다. A에는 가상통화도 속할 수 있지만 과거 온라인 게임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한 '게임 머니'와 '아이템'도 포함될 수 있다. 거래소를 중심으로 가상의 물질을 거래한다는 점에서 게임과 가상통화는 분명 닮았다. 여기에 비트코인의 채굴과정도 종종 게임에 비유되곤 한다. 블록체인 기반의 복잡한 연산과정 끝에 보상으로 비트코인을 얻는 일련의 과정이, 게임에서 어려운 레이드를 승리한 보상으로 경험치 등 보상을 받는 과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 출처=flickr

우연의 일치일까. 최근 가상통화산업에서 게임과 관련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17일 게임 전문기업 한빛소프트와 모다, 파티게임즈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가상통화 거래소인 ‘코인제스트(CoinZest)’ 설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에는 2013년 국내 최초 가상통화 거래소로 설립된 ‘코빗’이 국내 대표 게임기업 넥슨에 지주회사인 NXC를 통해 인수되기도 했다. 과거 게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PC방이 대규모 가상통화 채굴에 동원돼 ‘채굴방’으로 변모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게임 아이템 중개업체, 가상통화 거래소 진출 러시

가상통화 거래소 코인제스트 사업을 좀 더 들여다보면 특이한 이력의 인물이 떠오른다. 국내 온라인 게임 1세대이자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등의 국내 PC방 유통권을 따내 흥행에 성공시킨 김영만 B&M홀딩스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김 회장은 한빛소프트와 모다, 파티게임즈와 모두 인연이 있는 인물로 가상통화 거래소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이 이끄는 B&M홀딩스는 모다의 자회사로 게임 아이템 거래소인 아이템베이와 아이템매니아의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는 지주사다. 아이템매니아와 아이템베이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90%를 넘는다. 김 회장은 지난 2008년 한빛소프트 지분을 매각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2013년부터 B&M홀딩스를 이끌어왔다. ‘아이러브니키’ 등으로 유명한 파티게임즈는 가상통화 시장 진출을 위해 지난해부터 세차례에 걸쳐 B&M홀딩스의 주식을 매입하고 300억원 규모의 가상화폐공개(ICO)를 공동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비트코인 재단을 이끈 브록 피어스 회장도 게임과 관련이 깊다. 아역배우 출신인 그는 2001년 게임 아이템 거래소인 ‘인터넷 게이밍 엔터테인먼트(IGE)’로 게임사업에 뛰어들었다. 아이템 거래 사업을 크게 늘리던 IGE는 2006년 국내 1위 업체였던 아이템매니아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후 비트코인 등 가상통화 사업에 뛰어들어 비트코인 초기 투자자로 블록체인 캐피탈의 공동 창업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비트코인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와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고 투자를 결정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 브록 피어스 비트코인재단 회장. 출처=위키미디어

가상통화와 게임머니, 닮은 듯 다른 둘

전문가들은 게임 아이템 거래소 출신의 잇단 가상통화 거래소 진출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게임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국내 게임업계는 물론 게임 아이템 거래 사업까지 오랜 시간 몸담아 온 이들이 가상통화 거래소 시장에 뛰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면서 “아이템 거래소를 했던 사람들은 이게 똑같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게임머니와 가상통화 거래의 본질이 같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대 중반 온라인게임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리니지, 아이온,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아이온 등 인기 게임을 중심으로 게임머니 거래가 활발해졌다. 각 게임에서 사용되는 아덴, 키나, 메소, 골드 등을 현금과 맞바꾸는 일명 ‘현질’이 성행하며 이를 중개하는 거래소도 크게 성장했다.

게임머니를 전문으로 채굴하는 이들까지 등장하며 게임머니 시세는 ‘게임머니 1000만원 당 현금 만원’ 등 꽤 높은 가격에 거래되곤 했다. 리니지에서 사용하는 아이템 ‘진명황의 집행검’은 현금가격이 최소 2000만원에서 최대 수억원을 호가한다고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2006년 기준 아이템 현금 거래 시장은 연간 1조원 규모로 급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은행은 관련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게임머니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 게임 전문기업 한빛소프트와 모다, 파티게임즈가 17일 가상통화 거래소 '코인제스트' 사업을 발표했다. 사진=한빛소프트 제공

한국게임학회장을 맡고 있는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저서인 ‘한국형 혁신의 길을 찾다’에서 “한국은행은 현실 화폐와 교환이 되고 있는 가상화폐(게임머니)를 실제 통화량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물어왔다”면서 “나는 현실에서는 아직 영향이 미미하기 때문에 통화량으로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가상화폐가 확산되면 이를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고 가상화폐는 일국의 지역적 국가경제권력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말했다.

위 교수는 “당시 TF에서 해당 사항을 검토하다가 흐지부지된 것으로 안다”면서 “벌써 10년 전인데 그때부터 가상통화와 관련된 연구가 이어져왔으면 지금의 가상통화 문제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게임머니와 가상통화는 닮은 듯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가상통화는 채굴량이 정해져있지만 게임머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상통화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해킹이나 위변조가 어렵다는 점도 게임머니와 크게 다른 부분이다.

그러나 거래량이 늘어나면서 시세가 크게 오르고, 반대의 경우에는 가격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은 유사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게임 시장의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주요 온라인 게임들의 유저(이용자)가 대거 빠져나가면서 과거 ‘게임머니 1000만원 당 현금 만원’의 시세는 현재 ‘게임머니 1억당 현금 1000원’으로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가상통화의 경우 채굴량이 처음부터 정해져있는 만큼, 관건은 이를 통화나 화폐로서 통용하는 거래량이 지금보다 늘어날 수 있는지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