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것도 같다. 한편 가토는 부산으로부터 노리현을 넘어 철령 북쪽으로 향하여 날마다 수 백리를 나아가는 모습이 풍우와 같았고 일본군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그의 부하들도 용감하였다. 북병사 한극성이 6진의 정예병을 인솔하여 해정창에서 격돌하여 큰 전투가 벌어졌다. 감사 유영립과 남병사 이혼도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6진의 정예병이 말타기와 활쏘기가 능하여 가토의 군사는 지탱하지 못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창 안에 들어가 곡식과 돌로 은신하고 조총으로 쏘는 바람에 6진의 병사도 많이 전사하는 때에 주장인 한극성이 참지 못하고 먼저 달아나니, 그렇게 강하던 6진의 군사가 그만 장수를 잃고 무너져서 고개 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네, 가토의 군사는 그날 밤에 야습을 감행하여 고개 위로 올라가 한극성의 군사를 에워쌌는데도 아군의 군사는 잠이 깊게 들어 알지 못하였고,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틈에 조총으로 쏘고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도망하다가 방향도 모르고 진흙 속으로 빠져 거의 전멸되었으며 한극성은 한양으로 달아났고, 유영립은 산골짜기로 남병사 이혼은 갑산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만약 이충무공께서 북병사가 되었더라면 뛰어난 말과 용감한 병사를 데리고 반드시 대성공을 하였을 것이다.”
“맞습니다. 군인은 지휘관의 용맹함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전투는 머리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당한 민족이 과거를 잊고 다시 庚戌國恥를 당한 것은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음! 다른 민족과 다르게 세계 유일무이하게 분단된 국가이기에 더욱 더 교육에 힘을 써야 하는데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현실이 더 분하다.”
“네, 당시에 유성룡은 안주에 있어 사방으로 글을 보내 충의로운 마음을 분발한 의병을 일으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승려 중 사명당 임유정은 법당에 승려들을 모아 부처님 앞에서 유정승의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것에 승려들 모두가 사명당의 의기에 감동되어 나아가 죽기로 싸우기를 맹세하여 금강산 여러 사찰과 인근 각 읍의 승려들을 모아 1,000여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였습니다. 사명당의 자는 송운(松雲)입니다.”
“그런 와중에 평양에서는 고충경이란 사람이 의병을 일으켜 자주 평양에 있는 적의 소부대를 엄습하여 여러 번 적병을 죽였다.”
“네, 고니시는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50일의 휴전을 기약하고 명나라로 간 뒤에 기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것에 고니시는 의심하면서 휴전의 약속을 지켜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으나 11월이 되자 ‘새해에는 말에게 압록강의 물을 마시게 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의주를 공격하기를 선언한 말을 평양에서 적군의 포로로 있다가 도망하여 온 사람들에게 들으니 고니시의 군사가 성을 공격할 기구를 많이 준비한다는 말에 의주의 조정은 심히 무서워하였습니다.”

진주성 싸움

“음! 이때에 일본 비전(肥前=히젠)의 명호옥(名護屋=나고야)본영에서는 히데요시가 경상도 연해에서 일본 수군이 연이어 패한 것에 화를 내며 수군으로 조선의 수군 명장 이순신장군을 어쩔 수 없을망정 경상우도에 있는 진주성이라도 육군으로 하여금 무찔러 분을 풀려고 하여 수하의 맹장 세천충흥(細川忠興=호소가와 다다오끼), 가등광태(加藤光泰=가토 미쓰야사), 목촌중상(木村重尙=木村重玄 기무라 시게고레),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하세가와 히데이치) 등 일곱 장수에게 2만의 군사를 바다 건너 육로로 지형이 험하고 수비가 단단한 진주성을 깨뜨리라고 엄명하였다.”
“네, 이 싸움이 진주성의 첫 번째 싸움이고 진주목사는 김시민이었습니다. 김시민 장군은 당시에 문무를 갖춘 인재라 하여 이순신, 권율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조정의 장수 천거에 오른 사람이었으며, 진주 판관으로 여러 번 공을 세워 진주 목사에 부임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