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중반 미국에서 만들어진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심플 라이프>가 있다. 당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패리스 힐튼과 그의 절친인 니콜 리치가 등장해서 더욱 잘 알려졌다.

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하거나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부잣집 딸들이 시골에 내려가서 농장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온갖 좌충우돌이 프로그램의 재미 요소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부잣집 딸들이 도시에는 당연히 있는 것들이 없는 농촌의 모습에 놀라고 불만을 토하는 모습들이 시청자들에게 재미있게 보였는데 이를 지켜본 미국의 시골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TV에서 희화해서 등장하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과 이들의 생활 스타일 등이 전형적인 ‘힐빌리’의 스테레오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인종을 놀리거나 차별하는 것이 옳지 않듯이 시골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놀리거나 차별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힐빌리(Hillbilly)’는 본래 미국의 중남부 애팔래치아 산맥 지방의 농민과 나무꾼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시골에 사는 사투리가 억세고 옷차림이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을 힐빌리라고 불렀는데 이 표현은 1800년대 후반에 처음 등장했다.

한국말로 하자면 ‘시골뜨기’ 정도일 텐데 중남부 시골의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말로 일반적으로는 차별이나 업신여김을 포함한 비하의 의미다. 주로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심플 라이프>에서와 같이 용어가 널리 쓰이면서 시골 지역의 사람들을 싸잡아서 부를 때도 쓰이곤 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힐빌리는 시골 지역에 살면서 옷차림은 패션이라고 할 수도 없이 아무렇게나 편한대로 입는다. 게다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말도 아무렇게나 하고,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키면서 기분이 내키면 마구 총질을 해대는 무식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들이 종종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에는 독립적이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현대화에 저항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또 이들 스테레오 타입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힐빌리들은 알코올 중독이고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에 소위 ‘힐빌리’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이민자들이 넘어와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다른 미국의 농촌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남북전쟁 이후 다른 지역은 빠르게 발전해가는 반면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의 발전은 더디거나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나 대공황을 겪으면서 일자리가 아예 사라지자 많은 애팔래치아 사람들이 시카고 등의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는데, 이때부터 이들의 억센 억양과 옷차림, 행동들을 희화화하고 놀리는 ‘힐빌리’의 스테레오 타입이 굳어졌다.

힐빌리가 미 중남부 애팔래치아 지역의 소외된 백인 계층을 의미한다면, ‘레드넥’은 미국 남부 시골의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 노동자를 비하하는 단어다. 각기 다른 지역이지만 두 단어 모두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의 소외된 지역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백인들을 지칭한다.

지난 2016년 미국에서 출간돼 인기를 끌었던 자전적 소설 <힐빌리의 노래>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알코올 중독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외할머니 손에서 큰 ‘불우한 가정환경’ 출신이 어렵게 대학을 가고 예일대 법대를 졸업해서 출세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다시 일자리를 돌려주겠다, 회사들이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이 그렇게 열광하고 환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아예 출구가 꽉 막혀 있는 듯한 답답한 현실인데, 백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소수 인종에 비해서 혜택도 받지 못하고 역차별 받는다는 피해의식까지 겹쳐진 것이 현재 백인 빈곤층이 겪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