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시험에서 환자 모집과 의사들의 관심도는 질환에 따라 다르다. 몇 년 전에 외자제약사의 협심증 치료 시험약물 임상시험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계획 단계에서 진행한 가능성 조사(Feasibility Study)에서 국내 심장내과 의사들의 호응이 좋았고 환자 모집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1년 후 임상시험이 시작될 때쯤 스텐트 시술에 의한 협심증 치료가 보편화되면서 약물에 의한 협심증 치료는 관심 밖이 되었다. 환자를 단 한 명도 모집하지 못하고 임상시험을 취소해야만 했다.

영유아 백신 임상시험은 국내에서 대단히 어렵다. 정부가 안전성 유효성이 검증된 백신을 저가 또는 무료로 공급하기 때문에 영유아 보호자들이 임상시험 참여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혈우병 임상도 쉽지 않다. 선진국에서 개발된 혈우병 치료제가 국가비용으로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성 유효성이 검증된 의약품이 있는 경우 해당 질환 관련 임상시험은 어려워진다. 임상시험은 시험약품이 특정 조건을 만족시킬 때 가능해진다. 임상적 평형(Clinical Equipoise)이라는 조건이다.

이중맹검 무작위 배정 위약대조군 방법에 의한 임상시험이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Gold Standard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신약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임상적 평형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

임상적 평형은 진성(眞性)의 임상적 불확실성(Genuine Clinical Uncertainty)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안전성 유효성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의료계가 50대 50으로 의견이 나뉘는 경우 임상적 평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임상적 평형은 의학적 생리학적 이론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중추적(中樞的) 임상시험(Pivotal Clinical Trial)에 의해서만 풀린다.

임상시험은 귀무가설과 대립가설 두 가설로 구성한다. 귀무가설은 시험약물이 위약과 약효가 같다고(즉, 약물효과가 없다고) 가정하고 대립가설은 시험약물이 효과가 있다고 가정한다. 귀무가설과 대립가설 둘 중 하나가 진실이다.

임상시험에 의해 수집된 자료가 통계 분석에 의해 귀무가설이 기각되면 대립가설이 받아들여지고 귀무가설이 기각되지 못하면 시험약물의 유효성 검증이 실패한 것이다.

2006~2015년 미국 FDA 자료에 의하면 시험약물이 중추적 임상시험에서 성공하고 FDA의 승인을 받을 확률은, 질환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49.6%다(Clinical Development Success Rates 2006-2015, June 2016: Bio, Biomedtracker, and Amplion). 전기(前期) 임상시험에서 약물이 효과를 보이는 것 같아도 대규모 중추적 3상 임상시험을 거쳐서 의약품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50% 정도뿐이다.

임상적 유효성이 검증된 의약품은 임상적 평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중맹검 무작위 배정 위약대조군 임상시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Post-Marketing Study가 이에 해당된다.

시험약물이 전기(前期) 임상시험에 의해 유효성 안전성이 입증되었다 해도 임상적 평형이 존재하는 것은 중추적 임상시험을 거쳐 엄격한 심사에서 성공할 확률이 5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지 전기 임상시험의 결과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느 한 방향으로 결정적이라면 임상적 평형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귀무가설(Null Hypothesis)이 성립될 수 없고 무작위 배정에 의한 임상시험이 정당화될 수 없다. US FDA 자료에 의하면 전기 임상시험의 관문을 통과하고 3상 임상시험으로 진행될 가능성은 20%라고 한다. 전기임상시험의 80%가 안전성 유효성의 가능성 또는 시장성 증명에 실패한다.

희귀질환의 경우 전기임상시험만으로 임상적 평형이 풀리는 경우를 본다. B Type 혈우병에서 최근 유전자 치료가 6명의 환자에서 성공했다. 이런 결정적인 결과는 임상적 평형을 푼다. 1980년대 말 고셔(Gaucher)병 시험 치료 엔자임(Enzyme)이 태반에서 최초로 추출되어 소수의 환자가 치료를 받고 고셔병 증상이 완화되었다. 엔자임 대체 요법(Enzyme Replacement Therapy)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임상적 평형이 풀렸다.

우울증, 치매 등의 질환에 승인된 약물이 있다 해도 안전성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임상적 평형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신약후보물질의 중추적 임상시험에서 무작위 배정 위약대조군 방법이 정당화되는 이유다.

미국에서 후기임상시험을 진행하고자 하면 미국 FDA와 전기임상시험 자료와 후기임상시험 계획서를 제출하고 회의를 갖는다. 이를 ‘후기 임상 사전 회의(End of Phase II Meeting)’라 부르고 임상시험의 타당성 임상시험 설계와 계획 등을 논의한다. 후기임상의 타당성과 임상적 평형을 검토하는 회의이기도 할 것이다.

임상적 평형이 존재할 때만 Gold Standard라는 무작위 배정 위약대조군 임상시험이 허용된다. 임상시험 계획이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하는 이유다. 임상적 평형은 무작위 배정 위약대조군 중추적 임상시험에 의해서만 풀린다는 것이 임상시험의 과학과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