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경제학> 스티븐S.코언· J.브래드퍼드 들롱 지음, 정시몬 옮김, 부키 펴냄

도대체 경제는 어떤 상황일 때 성장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들은 그 해답을 영국의 식민지에서 세계 최강국으로 변신한 미국 역사 속에서 찾았다. 미국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 시장을 추구한 적이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로 꼽히는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과 제임스 매디슨(4대 대통령)은 작은 정부, 자영농, 작은 기업, 자유 무역을 골자로 하는 경제 체제를 주장한 바 있다. 만약 미국이 제퍼슨 등의 주장을 따랐더라면 지금쯤 농산물과 원자재나 수출하는 호주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초대 워싱턴 정부의 재무부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년)이 제시한 길을 택했다.

해밀턴은 제퍼슨과 달리 중앙집권적인 연방 정부를 중심으로 무역과 금융을 통제하여 걸음마 단계인 제조업을 보호·육성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 관세는 높게 유지했고 거둬들인 세금으로 철도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에 적극 투자했다. 그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와 금융도 통제했다. 자신이 구상한 특정 방향으로 자본과 인적 자원을 집중했다.

해밀턴의 ‘경제 재설계’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미국은 정부가 경제의 방향을 계획하고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정부의 경제 개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개입하느냐다. 미국의 역대 정부는 자원과 자본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때 나타나는 저항과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초당적으로 노력을 이어갔다. 정치지도자들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이었다.

미국의 철도건설은 미국식 경제정책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철도는 민간 기업들이 건설했지만 배후에는 큰 정치적 비전이 있었다. 정부가 우선적으로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여 민간을 통한 경제성장을 자극하고자 했다. 미국 정부는 철도가 놓일 구간을 조정하여 철도 사업에 나설 기업들에게 철도 주변의 토지를 불하하고 기술 지원을 해줬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 전역에 농장, 광산, 공장, 도시들이 건설되고 철강, 석탄, 기계산업들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량생산 방식의 기초를 놓은 것도 미국 정부였다. 미국 전쟁부는 18세기 말 프랑스와의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자 총기 생산의 기계화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이에 총기 제작사들이 앞다퉈 보다 효율적인 무기 생산 방식을 모색했다. 혁신적인 무기 생산 기술들은 시계, 재봉틀 등 타 산업에도 응용·확장되면서 일명 ‘아메리칸 시스템’으로 불리는 미국식 생산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포드주의(主義)’의 기초였다.

미국의 혁신도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혁신기업 애플의 아이폰을 구성하는 컴퓨터, 반도체, 인터넷 기술은 모두 정부 지원의 산물이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구소련에 군사 기술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종 첨단 기술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그 결과물이 ‘패킷교환’이었고, 이것이 훗날 인터넷의 기초가 됐다.

그러던 미국이 1970년대 기존의 경제 재편과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새로운 경제 공간을 창출하기보다는 탈규제에 몰입했다. 그 과정에서 금융과 각종 거래중개 사업이 선택되었다. 미국의 금융화는 비전이 명확하지 않았다. 미국 경제에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하나의 경제 이론을 굳게 믿고 그것을 밀고 나가는 이데올로기적 자세로 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 제조업은 붕괴했고 불평등은 심화되어 사회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경제가 침체에 빠져 2008년 금융 위기로 번졌다.

저자들은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 정책에 관한 논의를 구체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라고 조언한다. 이데올로기와 그 시녀 노릇을 하는 이론적 추상화 같은 사변적 영역으로부터 빠져나와 경제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사유와 담론과 제안을 구체적인 용어로 제시하라고 말한다.

한편 한국인에게 낯선 알렉산더 해밀턴은 1804년 부통령 에런 버와 허드슨 강변 절벽 아래서 결투를 벌이다 총에 맞아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업적을 인정받아 사후 달러화 인물로 새겨졌다. 10달러에 나오는 인물이 해밀턴이다. 대통령이 아닌데도 달러화에 오른 인물은 해밀턴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사람 뿐이다. 해밀턴의 사상은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시행되었고, 일본에 의해 동아시아로 이식되어 한국과 중국에서 경이적인 경제 성장과 변혁적인 발전을 이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