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술잔의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옥쟁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玉盤佳肴萬姓膏, 옥반가효만성고). 촛농 흐를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민루락),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도다(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한국의 대표 고전 <춘향전>에서 등장하는 한시(漢詩)다.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고향 남원에서 변 사또의 잔치상 앞에서 이 시를 읊었다. 이 장면은 부패한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한국 고전의 전형인 권선징악의 한 예를 절절히 보여주는, <춘향전>의 백미로 꼽힌다.

요즘 금융지주회사들은 지배구조 문제로 시끄럽다. 지주회사가 회장과 친분이 있는 사외이사들로 회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해 회장이 계속 연임을 이어가는 ‘셀프연임’ 논란이 뜨겁다. 금융당국이 개선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금융지주회사는 귀를 막고 나 몰라라 한다. 관치라는 핑계도 들먹인다.

이들은 본인의 연임 이유로 ‘실적’을 내세우고 있다.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실적으로 연임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KB·하나·NH농협금융 등 국내 4대 금융지주회사의 지난해 3분기 합계 누적 순이익은 7조7336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4조9293억원 대비 56.9% 증가한 규모다.

4분기에도 국내 금융지주회사들은 기대 이상의 실적을 달성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1.50%로 인상하면서 증권가는 금융지주회사의 4분기 실적 컨센서스를 높이며 앞다퉈 매수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실적이 좋으니 연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얼핏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금융지주사 실적을 속속들이 보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금융지주회사들은 여전히 은행 중심의 이자영업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역대 최고라는 지난해 3분기 실적에서도 금융지주회사의 순이익은 이자수익 증가 덕을 봤다.

4대 금융지주회사는 지난해 1분기부터 3분기까지 총 20조5399억원의 누적 이자수익을 올렸다. 전년 동기 16조6641억원에 비하면 23.2%(3조8758억원)가 는 것이다. 3분기 말 기준으로 4대 금융지주회사의 평균 순이자마진(NIM)은 1.935%를 기록했다. 대출금리 인상 등에 힘입어 지난해 말(1.85%)에 비해 0.085%포인트 올라갔다.

이자마진의 증가는 지난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상과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가시화로 시중금리가 오르면서 은행권 전반의 예대마진율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금융지주회사들이 거둔 실적이 좋은 것은 이들이 경영을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시장환경이 좋았고 부동산 호황을 틈타 고객인 국민들로부터 이자를 더 많아 받아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금융지주회사의 실적은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읊은 대로 ‘만백성의 피와 기름’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자 장사로 실적을 내고 그것을 자랑한다면 은행과 대부업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최근 만난 금융권의 고위 인사는 “그동안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성장한 금융회사가 실적을 자랑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반성을 겸한 조소를 흘렸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된 지 오래인 가계부채 감축을 국정과제로 정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새로운 대출상품을 개발하고 가계부채의 원흉으로 지목된 부동산 대출, 대출자의 피를 쥐어짜는 예대마진으로 얻어낸 실적을 강조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국민의 혈세로 조성한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권이 할 일인가.

금융회사도 회사인 만큼 이익을 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돈도 아닌 예금자의 돈으로 장사를 하고 그것을 자랑하며, 최고경영자가 오너 행세를 하는 데 대해 국민들은 결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선도은행이라는 허울 뒤에 이자마진 경쟁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회공헌을 늘리고 벤처투자를 통해 중장기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옳지 않겠는가.